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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힘과 파격의 묘미 함께 느껴보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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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09면

허윤정 나윤선

‘여우락’(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7월1~26일 국립극장)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난 5년간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열린 만남의 장을 제공하고 관객에게 국악의 새로운 매력을 알려온 사실상 국내 유일의 국악축제다. 매년 공연 비수기인 7월 장마철에 매진 신화를 이뤄내며 국악 대중화에 기여해온 여우락이 올해 또다시 변화를 꾀했다. 세계적인 재즈 아티스트 나윤선(46)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해 국제적인 페스티벌로 도약할 채비를 갖춘 것.

국악축제 여우락 예술감독 나윤선과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재즈 싱어가 웬 국악축제 예술감독인가 싶다면, 나윤선이 ‘아리랑 전도사’란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연 때마다 ‘아리랑’으로 세계인과 교감해온 그는 매년 백회이상 해외공연을 소화하는 ‘글로벌 마당발’이다. 올해를 국악 공부의 해로 삼고 국내에 머물러 오다 여우락을 도맡게 되자 거꾸로 우리 음악과 어울리는 해외 아티스트들을 불러들였다. 재즈와 국악의 창의적인 실험을 통해 ‘국악 바이러스’를 세계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다.

그런 그가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한 아티스트가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47)이다. 전통과 아방가르드를 넘나들며 세계무대로 뻗어가고 있는 허씨가 ‘여우락의 지향점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디렉터스 스테이지’와 ‘2015 초이스’ 테마를 각각 책임질 두사람은 개막공연 ‘여우락 콜렉티브’(1~2일) 무대에 함께 나선다. 재즈로 시작해 국악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나윤선과 국악에서 시작해 재즈를 아우르고 있는 허윤정. 두 사람은 과연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낼까.

‘2015 여우락페스티벌’ 쇼케이스 중에서

“선생님 얘긴 해외 뮤지션들 통해 더 많이 들었어요. 한 외국 기자는 ‘한국에 허윤정 같은 훌륭한 뮤지션이 있는데 왜 너는 프랑스에 와서 활동하느냐’고 묻더군요.”(나)

국립합창단장을 지낸 나영수 선생과 국립극장장을 지낸 고(故) 허규 선생을 각각 부친으로 둔 나윤선과 허윤정. 어려서부터 자매처럼 지낸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윤선이 허윤정 거문고의 울림에 반해 2013년 크리스마스 콘서트 때 처음 섭외한 것. 지난해 프랑스 비엔느 공연도 함께하며 정선 아리랑과 영국민요 등을 협연했다.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다’는 나씨의 회고에 허씨도 ‘큰 도전이었다’고 고백한다.

“전통음악이 아닌 보컬과 정식으로 만난 게 처음이었거든요. 워낙 열린 분이고 경험도 많아 들어가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저로 인해 좀더 독특해지고 좋아지는 건 제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피하고 싶었던 부분을 건드려주고, 깨고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는 도전이 되더군요. 이번 개막공연은 그때보다 훨씬 생각이 많아졌어요. 결코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쌓아서 음악적 결과물로 만들어내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허)

“국악 협연은 처음이었는데 같이 섰던 해외 뮤지션들이 너무 좋아하더군요. 거문고가 베이스와 비슷해서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파워풀하고 울림 있는 악기인 줄 몰랐다며, 자기들도 좀더 알고 싶다기에 저도 우쭐했죠. 제가 국악을 너무 몰라 솔직히 창피하기도 했고요. 굉장히 공부가 필요한 음악이란 걸 깨닫고, 공부를 결심한 계기가 됐어요.”(나)

굳이 여우락에 없던 컨셉트인 ‘올해의 아티스트’로 허윤정을 내세운 것도 국악을 꼼꼼히 알아보자는 제안이다. “해외 페스티벌에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꼭 있거든요. 리옹 오페라 같은 오페라극장에서 재즈 아티스트에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제가 존경하는 뮤지션이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공연을 5개나 하는데, 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놀라웠어요. 여우락에서도 한 뮤지션의 스펙트럼을 다 보여주면 관객도 배우는 게 많을 거에요.”(나)

“거문고는 사유와 영성의 악기”
허윤정은 여우락에서 피리 명인 정재국, 대금 명장 원장현 등과 전통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여류금객 거문고 노정기’(8일)와 재즈 아티스트들과 호흡을 맞추는 ‘Timeless Time’(14~15일)등 자못 상반된 무대를 선보인다. 전자에서는 대가들과의 문답을 통해 이 시대와 교감할 수 있는 전통의 힘을 보여주고, 후자에서는 추상화를 보듯 파격을 즐기며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무대를 꾸민다는 복안이다.

허윤정이 전자음향과의 접목을 꾀하는 등 거문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지만, 사실 거문고는 개량이 어렵고 서양 음악과 어울리기 힘든 올드한 악기라는 인식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국악기가 서양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음악에 거문고가 먼 게 사실이죠. 해금·가야금에 비해 거문고는 도태되는 게 아니냐 걱정들 하시는데,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오히려 타협하지 않을 수 있어 고맙죠. 비발디 ‘사계’를 안 타도 되니 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거문고는 거문고답게 현대적 감성을 표현할 방법을 찾은 거에요. 극과 극은 통한다고, 가장 전통과 가장 최첨단 아방가르드가 통하는 거죠.”(허)

뉴욕의 프리재즈 뮤지션들과 뭉친 월드뮤직 프로젝트 ‘토리앙상블’, 즉흥성에 기반한 현악 밴드 ‘블랙스트링’, 중국의 비파·일본의 샤미센과 합을 이룬 ‘이스트리오’등을 이끌고 있는 허씨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전방위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다. 지난해에는 프로젝트 밴드 ‘모자이크코리아’ 리더로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한국문화원 순회공연에서 폭발적 반응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이수자’이기도 한 그는 “한 번도 정체성이 흔들려본 적 없다”고 단언한다. “제 정체성은 전통이에요. 전통을 할 때가 제일 좋고, 한 번도 더 좋은 음악을 만나본 적 없어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음악들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늘 저를 잡아주는 전통으로 돌아오죠. 뿌리가 단단해야 가지가 산발해도 다시 뭉쳐지잖아요.”

전통과 아방가르드. 그의 두 가지 노선은 모두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거문고는 마이너 악기’라는 그의 말대로 사실 거문고는 역사적으로도 사유와 철학을 추구해온 매니어적 악기다.

“모든 악기가 대중적이고 보편성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죠. 저는 ‘좁고 깊게 가는 음악’을 하지만, 국악 장르의 대중화에 있어서 나 선생이 여우락을 맡아준 건 감사한 일이에요. 잘 모른다면서 물어보면 다 알아요. 모든 젊은 국악 뮤지션들의 음악을 찾아서 들어봤더군요. 그들에게 뭐가 필요하고 어떻게 끌고 가야하는지 감각적으로 짚어내면서 정말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나윤선 예술감독’은 국립극장의 ‘신의 한 수’였다고 봅니다.”(허)

“아리랑 같은 우리 가락 만들고 싶어”
올해 여우락은 4가지 테마 아래 총 14개의 공연을 펼친다. 모두 여우락만을 위한 신작이다. 나감독은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 섭외까지 도맡고 연습과정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다. “안호상 극장장님이 딱 한마디 하셨어요. 젊은 국악인들을 도와 달라고요. 뮤지션들을 직접 만나보니 다른 음악에 대한 동경이 많더군요. 방법을 모르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고민만 하고 있는데, 제가 선배로서 도와줄 방법을 찾고 있는 거에요. 국립극장을 등에 업었으니 가능한 일이죠.”(웃음)

2015 여우락의 가장 큰 차별점도 나 감독의 인맥을 활용해 국악에 우호적인 해외 아티스트들을 적극 초빙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타악 연주자 스테판 에두아르, 핀란드 재즈 피아니스트 이로 란탈라, 프랑스 플룻 연주자 죠슬렝 미에니엘 등을 국악 팀들과 각각 매칭시킨 ‘믹스 앤 매치’ 세션이다. 해외 뮤지션들에게 한국 음악에 영감받은 곡을 만들게 하고, 세계 무대에서 지속적인 협업을 도모한다는 목적이다. 재즈와 국악이 모두 즉흥에 기반해 궁합이 좋다지만, 처음 만나는 이들이 대체 어떻게 호흡을 맞출까 싶기도 하다.

이런 의심을 간파한 듯 나 감독이 살짝 공개한 무속음악그룹 바라지와 프랑스 기타리스트 뉴엔 레의 협업 샘플은 진도씻김굿과 전자기타의 시나위가 퍽 흥미로웠다.

“올해 부르는 뮤지션들은 이런 협업을 평생 해온 사람들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요. 국악 뮤지션을 결코 멀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악도 다른 음악과 똑같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생각 못했던 걸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과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겠죠. 우리 걸 그들 틀에 맞추게 될 지도 몰라요. 그때는 경우의 수가 생기고, 뮤지션의 선택의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이런 장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잖아요.”(나)

그는 모든 참여 뮤지션에게 누구나 따라부를 만한 쉬운 멜로디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아리랑처럼 모두가 흥얼거릴 수 있는 한국적 가락을 많이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에서다. 허윤정도 마지막 공연 ‘Timeless Time’에 선보이려고 준비중이란다.

“처음 제게 아리랑을 부르자고 제안했던 스웨덴 기타리스트 울프 아저씨 때문에 해외 공연에서 스웨덴 민요도 많이 불렀어요. 스웨덴엔 그런 민요가 천곡쯤 된다는데 사실 다 비슷하게 들리거든요. 8마디, 16마디짜리 단순한 곡들이죠. 우리도 그런 노래가 백곡, 천곡쯤 있었으면 하는 희망에서 제안했어요. 다들 하겠다고는 했는데 정말 만들고 있는지 확인은 못해봤어요. 부담될까봐 강요는 못하지만, 저는 꼭 하나 만들 겁니다.” (나)

오랜 해외활동을 잠시 접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는 나 감독은 요즘 여창가객 강권순에게 정가 레슨을 받으며 힐링 효과를 경험하고 있단다.

“단선율의 음악은 호흡이 훨씬 길고 여백이 많더군요.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호흡이 전혀 달라요. 서양 음악은 짧은 순간에 들이마셔 오래 끌어야 되잖아요. 몸과 정신이 연결돼 있다는데, 옛 선비들이 왜 정가를 불렀는지 알겠어요. 스스로 정화시키면서 건강해지는 거죠. 제가 짧은 시간에 다 배울 순 없겠지만 그런 호흡과 정신 같은 걸 조금이라도 얻어갈 수 있으면 해요.”(나)

“정가 노랫말이 얼마나 섹시한지 몰라요. 나 선생이 정가를 레퍼토리 삼아서 우리 정가를 널리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권순 선생이 레슨비도 안 받겠다는 걸 굳이 놓고 오셨다네요.(웃음)”(허)

폐막공연 ‘시작된 여행’(7월 25~26일)은 새로운 컨셉트의 나윤선 개인 콘서트라 할 만하다. 그의 기존 레퍼토리를 국악기로 재해석하고, 그가 새롭게 작곡한 한국적 노래들을 재즈 어법으로 풀어내는 용광로 같은 무대가 될 듯하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지만, ‘국립’에 대한 책임감도 무거워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라고 고백했다.

“공연 전체를 국악과 믹스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전에는 피처링 정도였죠.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사실 제가 더 궁금해요. 국악기와 양악기 개성을 각자 잘 살려야하는 게 큰 과제에요. ‘두려움 반 걱정 반’입니다.”(나)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nag.co.kr, 사진 포토그래퍼 나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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