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8)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131)|정월 나혜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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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30년대로 말하면 동양화에 있어서는 5대가니, 10대가니 해서 상당히 활기를 띠었지만 서양화는 그렇지 못하였다. 「선전」이라고 부르는 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거기 서양화부가 있었지만 입선작가는 겨우 세사람, 고희동·나혜석· 정규익 뿐이었다.
1925년의 제4회 때에는 조금 나아져 입상자가 나혜석의 『낭낭묘』, 이승만의 『라일락』, 이제창의『여』, 손일봉의 『풍경』, 강신호의『정물』 등이었는데 각각 4등상을 받았다. 상중의 제일 꼬라비 상인 것이다.
제7회의 특선작은 이승만의『풍경』, 김종태의『포즈』, 김주경의 『석모』, 손일봉의 『풍경』등 넷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10회까지를 훑어보았는데, 거기서 우수한 작가를 뽑는다면 나혜석·이승만·김종태·강신호·손일봉·김주경등을 고를수 있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창시자인 춘곡 고희동은 어느새 슬그머니 동양화 쪽으로 붙어 서양화의 팔레트를 던져버렸고, 그다음 춘곡 뒤를 이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김관호·김찬영은 처음에는 대단히 빛나는 작품을 내어 전도가 촉망되더니 두사람이 다 2, 3년 지난뒤 작품활동을 안하고 숨어버렸다.
이무렵 제일 정력적인 활동을 보인 사람은 정월 나혜석이었다. 「선전」에. 첫회부터 출품하여 11회까지 해마다 출품했고, 또 거의 해마다 특선의 영예를 받은 우수한 여류화가였다.
나혜석은 고희동이 1915년, 김관호가 그 이듬해, 김찬영이 또 그 이듬해인 1917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것에 뒤이어 1918년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학교에서 도화선생 노릇을 하다가 1920년 경도제대를 졸업한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그후 「선전」에 매해 출품하여 우리나라 유일의 여류화가로서 기염을 토하였다.
정월은 1896년 수원 남수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비지는 나기정이고 5남매중 둘째딸이었다. 나이로 치면 춘곡보다 10년 아래지만 이당보다 4년 아래, 청전보다 1년 위요, 심산보다 3년 위다. 그러므로 우리나라화단에서는 당당한 원로급의 대가라고 할수 있다.
그는 예술가로서 다정다한한 여인이어서 첫 애인은 목포출신의 경응대학 문과생이던 최영구였다고 한다. 최영구와의 로맨스는1910연대의 우리나라 완고하기 짝이 없는 시대에 있어서 큰 화제거리였다. 정월은 1913년 열일곱살때 동경에 건너가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매우 숙성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춘원 이광수가 한도전대학에 다닐때 교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당자들한테서 들은 일이 없고, 횡보 염상섭과 교제가 있었다는 것은 횡보 이야기로 들었고 잎서 본난에서도 염상섭을 이야기할 때 쓴 일이 있다.
김우영과의 결혼도 중매결혼이 아니라 연애결혼이었다. 나혜석이 3·l운동때 검거되어 재판을 받는데, 그때 변호사가 김우영이었다. 김우영이 열심히 변호한 덕택으로 나혜석은 형량이 가벼워졌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이 싹튼 모양으로 나혜석이 출옥하자마자 즉시 결혼하였다.
정월은 1921년 3월 경성일보 3층 내청각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때 신문에 난·『나정월여사의 작품전람회를 관하고』라는 작품평을 소개하면-.
『일개 여자로서 해외에 유학할새 그림을 연구하여 전에 무하고 후에 또한 희유할 여자화가가 되어 금에 개인전람회를 개하였으니 그 지의 고상함과 그 재의 탁월함이야 어찌 써 다 말할 수 없는중 더우기 70여점의 다수함이리오. 작품의 공졸을 평하건대 좀더 필단의 정미한 세를 생케함이니 사생 당시의 기분을 실치 말라함이오, 또 색채를 좀더 잘 조화하라 함이니, 즉 명암과 농담을 정확히 함이로다.』
좀 길었지만 당시의 문장도 볼겸 대단히 흥미 있는 작품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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