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편성, 사업 조정 놓고 부처 간 힘 겨루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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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02면

우리나라 정부 R&D 사업은 1982년 처음 시작됐다. 당시 과학기술부의 특정 연구개발사업 예산은 고작 133억원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15년, 이 예산은 18조8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단순 금액으로만 보면 무려 1000배 넘게 증가했다.

정부 R&D 정책 ‘컨트롤 타워’ 없다

그러면서 예산의 효율성과 연구 생산성을 늘리기 위해 과학 정책·예산을 아우르는 ‘종합조정체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시작은 99년 설치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다. 정부 R&D 사업을 조사·분석·평가하는 동시에 중복 연구를 사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부 장관이 부총리급으로 격상되면서 국과위의 역할이 한층 강화됐다. 예산 심의 대상이 산업·인력·지역혁신정책으로 확대됐고, 과기부 산하에 설치한 과학기술혁신본부를 통해 정부 R&D 사업의 예산 지출규모 설정, 예산 조정·배분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충남대 손진훈 교수는 “다만 R&D의 핵심 부처(과기부)가 사업 집행과 조정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에서 ‘선수심판론’ 논란이 일었다”고 말했다. 혁신본부장 직급(차관급)이 낮아 범부처 간 연구 조정이나 거시적 예산 처리가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했다.

정부 R&D 예산 33년 새 1000배 늘어
이명박 정부 들어 과기부는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됐고, 과학기술혁신본부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과기부 해체를 놓고 과학계의 비난이 거세지자 이명박 정부는 2011년 국과위를 대통령 직속 상설 행정위원회로 탈바꿈시키며 변화를 꾀했다. 위원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해 컨트롤 타워 기능도 강화했다. 그러나 이마저 위상과 역할이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정권이 바뀌며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의 과학정책 컨트롤 타워는 국무총리실 소속 국가과학기술심의회다. 5년 단위로 과기 분야의 최상위 계획인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매년 초 정부 R&D 사업을 검토해 중복 연구를 걸러내며 예산을 조정·배분한다. 그러나 실제 예산을 집행하는 권한은 기획재정부에 있고, 국과심은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에 그친다.

국과심이 기재부에 제출하는 R&D 예산 배분·조정(안)은 100여 명의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6개 전문위원회의 검토와 운영위원회, 본회의를 거쳐 만들어진다. 이 시간만 6개월이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국과심의 한 전문위원은 “국과심도 수백 개의 사업을 일일이 조사하지 못하는데, 전문성이 부족한 기재부가 이를 면밀히 평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예산 편성 때 기재부와 국회를 거치면서 실제 필요한 R&D 예산이 깎이고, 저평가된 사업의 예산이 늘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행정력 낭비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과심은 정부 R&D 사업에 대한 조정 권한도 미약하다. 각 부처가 제출한 사업 중 기술성 평가만을 담당할 뿐이다. 미국에서는 과학기술정책실(OSTP)이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 관리예산실(OMB)과 긴밀히 공조해 연구 우선순위를 정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국과심 위원장인 국무총리의 교체가 잦은 데다 객관적으로 과기 정책과 예산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싱크탱크’도 마땅치 않다.

지금은 정부 R&D 사업을 각 부처가 서로 경쟁하듯 수주하는 게 현실이다. 과기 정책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변한다. 예산 편성권이 없는 국과심이 장기적인 R&D 전략을 세우는 것도, 부처 간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국과심 권한 미약 … 대통령이 챙겨야
이런 문제를 극복할 ‘범부처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과학계의 요구는 끊이지 않는다. 기술집약형 산업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장기적인 과학정책과 이를 뒷받침할 선행투자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손진훈 교수는 “정부가 맡아야 하는 공공·대형 R&D는 각 부처의 협의가 필수다. 하지만 관료주의로 기득권 싸움을 벌이는 공무원 조직이 변하지 않고선 해결될 수 없다. 아니면 부처 간 파워게임을 넘어설 수 있도록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나서서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계의 해묵은 논쟁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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