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대담] '동북아 균형자론' 실현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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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철기 교수-동국대·국제관계학(왼쪽)
“한·미 동맹 일변도 벗어날 때 중국·러시아 적절히 활용해야”
김기정 교수-연세대·정치학(오른쪽)
“외교 다변화 시도는 시기상조 구체적 방법론도 모호한 상태”

‘동북아 균형자론’이 세간의 화두다. 노무현 대통령이 2월 24일 국회 연설에서 처음 제기한 이후 3월 22일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잇따라 공개 언급하면서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은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한·미 동맹에 되레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인가. 김기정 연세대 정외과 교수와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를 초청해 긴급 대담으로 현 상황을 심층 진단했다. 사회는 정치부 김진국 부장대우가 맡았다.

▶사회=동북아 균형자론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약간 혼란스러운 것 같다.

▶김기정=처음 이 용어가 나왔을 때는 의미가 매우 모호했던 게 사실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비판 여론이 일자 계속 가다듬어 가는 중이다. 일단 균형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말 그대로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역할을 의미한다. 이와는 별도로 균형외교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후자를 의미할 경우 한국이 추구할 수 있는 역할로는 ▷지역 협력의 촉진자(facilitator)▷갈등의 중재자(moderator)▷공동 번영을 위한 어젠다 창안자(initiator) 등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혼동돼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대처하기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이철기=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동북아 질서가 패권경쟁으로 치닫고 있고, 미국의 정책방향도 동북아 구도를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이제 자주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안보 패러다임에 있어 엄청난 변화를 의미한다. 지난 50년간의 안보정책은 사실상 한.미 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여기서 조금 탈피해 보겠다는 얘기다. 유럽은 동맹체제와 다자질서가 공존하면서 화해와 통합의 길로 가고 있는데 아시아는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갈등만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 이에 편승한 일본의 군사대국화, 중국의 중화사상 등이 충돌하면서 갈등만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런 갈등이 심화하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 질서가 갈등의 질서가 되면 남북 통일은 불가능해지고 분단은 고착화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면서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고 균형외교를 유지해 간다는 차원에서 나온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김=지금의 동북아 질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불안정 요소가 지속되고 있다. 둘째로 역사적 갈등과 대립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또 집단 방위체제 등 갈등 조정과 평화 정착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결여돼 있다. 때문에 아주 쉽사리 냉전시대의 대립질서로 복귀할 우려가 크다. 즉 유럽과 달리 동북아 지역은 여전히 홉스적인 무정부성(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무리 다자질서를 통한 평화와 협력을 강조해도 개별 국가의 국익 추구 과정에서 그 같은 명분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이=노 대통령의 발언에서 비롯되는 논리적 모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언급하면서 한.미 동맹을 토대로 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둘은 매우 상충하는 개념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기존의 한.미 동맹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비판여론이 일자 한.미 동맹을 기초로 하는 것으로 정부 입장을 서둘러 정리한 인상이 강하다.

▶사회=방위비 분담금 협상 이후 한.미 간 갈등 요소가 잇따라 분출하고 있다. 미국 일각에서는 전략적 유연성 논란에 이어 터져나온 균형자론에 대해 냉소적 반응마저 나온다. 국내 일부 학계와 정치권에서도 "동북아 균형자론은 결국 한.미 동맹의 진혼곡이 될 것"이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이=미국은 한.미 동맹을 아시아 동맹으로 재편하고자 하고, 주한미군도 한반도 밖에서 작전을 펼 수 있도록 바꾸고자 한다. 하지만 이제 미국도 국제정세 변화 속에서 양국의 이익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이 동북아 3국의 역사성을 무시하면서 올바른 동북아 정책을 펼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한.미 동맹이 지난 50년간 유지되면서 변화하는 환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최근의 파열음을 부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동맹의 재조정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미 동맹의 필요성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운용 방법론에 있어서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한.미 동맹의 문제는 균형자론과 별개로 심도있게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이=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도 모순점이 발견된다. 우리 정부는 '전략적 유연성이란 개념은 받아들이되 사전에 협의하라' '대중국 작전은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협의 자체가 요식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또 미국에는 중국이 가장 중요한 타깃인데, 전략적 유연성을 논하면서 중국을 제외하라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김=일본의 우경화에 따른 한국과 중국의 반일감정이 동북아 지역에서 굉장히 불안정한 요소로 등장했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게 미국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일 동맹만 밀어붙이기엔 역내 국가들의 저항이 만만찮다.

▶사회=북핵 문제와 중국의 대응도 변수가 될 텐데.

▶김=북한은 이라크를 보면서 핵 보유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미.일은 미사일방어체제(MD)로 맞설 태세다. 이 같은 대립구도가 가속화할 경우 가장 불리한 국가는 중국이다. 한국도 대립질서가 굳어지는 것은 막아야 하는 절박한 입장이다. 그런데 미.일 국제공조와 대북 압박정책에 한국이 마냥 동조하면 대립질서가 급속히 고착화할 게 뻔하다. 균형자론은 이를 방지해 보자는 취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북핵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범위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냉엄한 현실이란 점이다.

▶이=최근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이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과거엔 한국.일본 등 중국의 동쪽에만 군대를 배치했는데 지금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국의 서쪽에도 배치해 양쪽에서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이다. 주한미군 재편과 일본의 역할 확대도 이 같은 전략의 일환이다. 특히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동북아 평화에 대단히 위협적이다.

▶사회=최근 한 달여 동안 정부의 대일 강경 기조와 동북아 균형자론이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보나.

▶이=동북아 균형자론은 일본에 대한 경각심도 포함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행보를 보면 역사 왜곡 등을 내부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변국과 영토 분쟁을 촉발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을 때림으로써 현 상황에서 미국을 축으로 하는 한.미.일 3국 동맹은 받아들일 수 없음을 확실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김=우리 정부는 지난 한 달간 일본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이는 동북아 질서를 대립질서로 몰고 가려는 일본에 대한 경고의 성격도 담고 있다. 한.중과의 외교적 파열음을 마냥 감내하기엔 일본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은 일본에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이종석 NSC 차장은 "동북아 균형자 역할은 한.미 동맹을 축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균형자론의 구체적 실현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무엇보다 균형외교 정책이 절실하다. 한.미 동맹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야 할 시점이 됐다. 중국.러시아도 활용하는 다변화 외교가 절실하다. 동북아 질서를 유럽의 다자질서로 가져가는 게 우리의 과제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김=외교적 다변화 전략은 동북아 균형자론의 주요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내용을 무엇으로 채워갈 것인지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모호한 상태에서 지금부터 하나씩 마련해 가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방외교의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메이킹에도 신경 써야 한다.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당장 한.미 간 갈등 요소가 여기저기서 불거질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적잖다. 오히려 이런 갈등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정하고 극복할 것이냐가 풀어야 할 과제다.

▶김=국제정치를 힘의 정치, 세력균형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국내적 인식의 타성이 가장 큰 난제다. 국제질서가 힘의 강약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 보편적인 관념 등 무형의 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보편성만 강조하다 보면 참여정부가 주창하는 실용외교의 틀을 벗어나 명분론에 빠질 위험성도 상존한다. 북핵 문제가 우리 기대만큼 빨리 풀리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정리=박신홍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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