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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권력’ 에르도안 입지 흔들 … 반서방 외교 누그러질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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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호 15면

지난 7일 실시된 터키 총선에서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창당 13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사진은 지난 9일 앙카라 시내에서 이번 총선을 통해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한 인민민주당(HDP)의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지난 7일 실시된 터키 총선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의개발당(AKP)이 사실상 패배했다. 13년째 집권하고 있는 AKP는 이번 선거에서 40.8%를 득표했다. 제1당의 위치를 고수했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창당 이후 처음이다. 전체 의석 550석 중 258석에 그쳤다. 이 때문에 AKP가 사실상 패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집권당 총선 패배 후 터키 정국 향방은

AKP는 현재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과 연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HP는 25.1%의 득표율로 132석을 차지했다. 양당이 연정을 구성할 경우 390석을 확보하게 돼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대통령제로의 개헌도 가능해진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현재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터키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어 자신의 권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터키 헌법상 전체 의석 수의 3분의 2 이상(367석)을 확보하게 되면 국민투표 없이 개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AKP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이를 보는 터키인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이번 총선에서 각각 80석을 얻은 민족주의행동당(MHP)과 인민민주당(HDP)은 이미 AKP와의 연정을 거부했다.

1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이번 총선 결과로 인해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력 강화 구상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연정을 구성할 경우 대통령제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며 다시 총선을 치르게 되면 AKP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AKP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CHP와의 연정 구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CHP의 케말 크르츠다로울루 대표는 “연정 구성 실패로 총선을 다시 실시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자 국민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며 연정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터키 법에 따르면 총선 후 45일 이내에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터키 정가에서는 AKP와 CHP의 연정 시나리오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터키 외교정책 실용주의로 전환될 것”
이번 총선에서 가장 큰 수혜자 중 한 명은 HDP의 셀라하틴 데미르타시 공동대표다. 그는 터키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HDP는 13%의 지지를 얻어 80석을 확보했다. HDP가 의회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데미르타시 대표는 “우리의 목표는 쿠르드족과 터키인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외신들은 “터키 내 쿠르드족의 목소리가 과거와 비해 매우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AP통신 등은 AKP의 사실상 패배로 터키의 외교정책 기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 정권의 외교정책은 반(反)서방을 기반으로 한다. 이란 등 다른 이슬람 국가만큼 강경하진 않지만 주요 지지층은 보수적인 무슬림이다. 이로 인해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회원국으로 군사적으로는 서방과 협력하고 있지만 마찰도 적지 않았다. AP통신은 “터키의 외교정책이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이상주의에서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며 “국내적으로도 권위주의 체제가 많이 약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AKP를 이끌어온 에르도안 대통령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에르도안은 2003년 이후 12년 동안 실권자인 총리를 지냈다. 4연임 금지 규정에 따라 지난해 대선에선 대통령으로 출마, 당선돼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향후 입지는 점점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총선 결과도 그에 대한 지지세력 이탈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를 두고 터키 내에서는 에르도안의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칸 알티나이 예일대 중동문제 연구원은 “이번 터키 총선은 기존의 정치 구조를 뒤집어 놓았다”며 “향후 강력한 권한을 가진 리더가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 정치를 주도하긴 어려울 것이며 터키 정치가 좀 더 실용주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언론 탄압, 여론 외면에 지지층 이탈
지난해 대선에서 에르도안이 51.5%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의 집권 초기 업적에 따른 보상이며 그에 대한 마지막 신뢰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에르도안 정권은 출범 초기 매우 성공적이었다. 집권 이후 7~8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10%에 육박했고, 이전과는 다른 민주화 개혁도 일궈냈다. 이런 성과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로 이어졌다. 터키 일각에서는 “지난 대선 결과는 에르도안에게 초심을 버리지 말고 예전처럼 국가 발전을 위한 정치에 매진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하지만 에르도안은 이를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지지로 오판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3년 에르도안 정권은 여론수렴 없이 ‘술 판매 규제법’과 ‘이스탄불 탁심공원 재개발 사업’ 등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여 적지 않은 지지층을 잃었다. 탁심공원 재개발 사업 반대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터키 민심은 본격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또 터키 이슬람 사상가인 펫훌라흐 귈렌이 주도한 교육 개혁을 위한 ‘히즈멧(봉사) 운동’과 언론 탄압은 국제적인 비난까지 받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에르도안은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외면하고 공개적으로 집권당을 지지해 눈총을 받았다.

“에르도안 중립 지키게 해야” 목소리
이 때문에 에르도안과 AKP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크게 두 가지다. 에르도안의 정치적 입지가 향후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것과 AKP가 에르도안을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을 겪을 수 있다는 예측이다.

이번 총선에서 지지세력을 크게 잃은 AKP의 일각에선 “에르도안이 향후 AKP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를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대통령직에 묶어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목소리가 힘을 받지 못할 경우 AKP는 내분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에르도안 지지·반대파가 격돌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불행히도 터키의 운명이 인기가 추락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AKP에 걸려 있는 셈이다.

알파고 시나씨 터키 지한통신 한국특파원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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