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 주창자 후쿠다 “삼성, 신경영 잊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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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지금까지 성공한 기억을 모두 잊어야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리셋(Reset)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을 촉발시켰던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쓴 주인공인 후쿠다 다미오(67·사진) 전 삼성전자 정보통신 부문 디자인 고문(현 일본 교통공예섬유대학 명예교수)이 “신경영 선언은 잊으라”며 날선 조언을 쏟아냈다. ‘삼성이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점’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는 11일 삼성 사내 미디어인 ‘미디어 삼성’과의 인터뷰에서 후쿠다 보고서가 이젠 유효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1993년 당시는 사원도 적고 기업 규모도 크지 않아 혁신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면, 지금은 규모가 커져 훨씬 어렵다”며 “삼성은 이제 글로벌 1위 기업이라 목표로 삼을 곳이 없다. 선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래에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삼성 전체가 고민해야하는 시기”라며 “지금 준비하면 5년 후에 답이 나오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10년 후 삼성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주력 업종·제품을 바꾸고 있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파나소닉·소니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삼성도 그런 결단을 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비즈니스는 그룹의 시너지는 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단일 업종의 기업만으로는 큰 일을 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는 1993년 당시 삼성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담은 ‘후쿠다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제출했고, 이 회장은 이를 토대로 그해 6월7일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대변되는 신경영 선언을 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일부 직원들이 ‘한 두 달 간은 서울에 가지 않는 게 좋겠다. 가면 돌 맞을 수 있다’고 농담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당시 이 회장이 제 보고서를 읽고 ‘이런 일이 있었냐’며 크게 화를 냈다고 들었다”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임원들을 불러들였고 그곳에서 굉장한 회의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회장에 대해서는 “조용하고 억양 없이 일정한 톤으로 천천히 말하지만 질문은 굉장히 날카로웠다”고 기억했다. 그는 “한국 디자인 수준 같은 일반적인 질문은 물론 CAD와 같은 특정 기술에 대한 질문, ‘디자이너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까지 했는데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며 “그런 식의 질문을 하는 경영자는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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