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 동시'에 담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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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서 악밖에 안 남은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데 부모는 그 광경이 멋지다며 사진을 찍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막힙니다. 부모는 아이의 앞길을 생각을 하긴 했는데 너무 ‘나만의 방식’을 들이댄 것 같아요.” (이도겸, 서울 공진중2)

“사실 어린이들이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내면적으론 더 과격한 표현을 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심리적 억압과 강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 아닐까요.” (김도영, 대전 샘머리초 5)

‘잔혹 동시’ 논란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쓴 동시집 『솔로강아지』에 수록된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의 폭력성이 도마에 오르자 출판사에서 결국 전량 회수하고 폐기 처분한 사건이었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로 시작하는 시였다.

한동안 온오프라인을 달궜던 ‘잔혹 동시’ 논란은 사실 어른들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었다. 막상 동시의 독자층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0대를 위한 주간 신문 ‘소년중앙 위클리’는 소개한 ‘잔혹 동시 논란’에 대한 10대들의 의견을 들었다. 10대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학원 가기 싫은 마음은 부모님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신다인, 서울 일원초 6)며 출판사를 비판하는 의견부터 “창작물의 표현 한두 개를 문제 삼아 비판할 것까지는 없다. 뉴스에서 굳이 문제 삼을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김도연, 과천 관문초 6)는 의견까지 잔혹 동시 자체를 바라보는 스펙트럼은 넓었다.

하지만 시를 쓴 어린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고 변호하는 입장이 많았다.

“많은 어른들은 못마땅하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죠. 또래인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며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시는 요즈음 10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실감나게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홍찬빈, 고양 아람초 5)

10대들은 이번 사태를 통해 사회와 어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린 작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난에 열을 올리는 것도, 애초에 아이들이 학원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갖게 한 것도 모두 잘못입니다.”(이지원, 충주 북여중 1)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그 시대를 반영합니다. 이번 일은 액자 구성의 꽁트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일그러진 꽁트.”(이도겸, 서울 공진중 2)

소년중앙 독자들의 이 같은 의견을 정리한 기사가 페이스북에서 공유되자 “어른들이 이 아이들에게 배워야겠네요”(Moon Shin) “중2가 쓴 글에 감탄하고, 존경을 표하기도 난생 처음이네요”(이규승)라는 등의 반응이 나왔다.

▶잔혹 동시 논란에 대한 소중 독자 의견 전문 보기

정리=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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