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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부품 대일 수출 반토막” … 유커, 명품 사러 일본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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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26일 현재 루이비통 네버풀 라마쥬백(M41603)은 한국 면세점에서 184만원이다. 같은 제품을 일본 도쿄 긴자(銀座)의 루이비통 매장에서는 17% 싼 152만원(외국인 판매가)에 살 수 있다. 엔저(円低·엔화 약세)가 드리운 그늘이다. 원-엔 환율은 지난해 10월 이후 100엔당 1000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9일엔 896원을 찍으며 7년여 만에 900원대 밑으로 내려앉았다. 철강·석유화학·반도체 같은 일본과 경쟁하는 대다수 주력 산업에선 “한계에 다다랐다”는 비명이 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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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 선박용 엔진 부품을 수출하는 전북의 한 기계업체는 엔저를 피부로 느낀다. 3년 전 ㎏당 2달러에 넘겼던 부품을 올 초 ㎏당 1.7달러까지 떨어뜨렸다. 일본 경쟁사와 가격을 맞추기 위해 내놓은 고육책이다. 이 업체 김모(53) 부장은 “최근 거래선을 만났더니 ‘㎏당 1.3달러로 떨어뜨리지 않으면 일본 업체로 거래선을 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라”며 “3년 전 30억원 규모였던 일본 수출이 14억원으로 반 토막 났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금속업체 이모(54) 대표는 “최근 유럽에서 일본 경쟁사가 싼값으로 치고 들어왔다”며 “한번 거래선을 빼앗기면 회복이 어려워 팔수록 손해 보면서도 가격을 후려쳤다”고 털어놨다. 농수산 업계도 타격을 입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일본에 수출한 어류는 2012년 7800억원에서 지난해 5900억원 규모로 줄었다.

 기업들이 버틸 수 있는 상황은 한계치에 다다랐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일본 수출 업체와 해외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기업 300개사를 설문한 결과 55.7%가 “엔저로 수출에 피해를 봤다”고 답했다.

기업들이 감내할 수 있는 원-엔 환율은 평균 924원으로 나타났다. 업종별로는 철강(963원)이 가장 높았고 ▶석유화학(956원) ▶기계(953원) ▶식음료(943원) ▶자동차·부품(935원) ▶조선·기자재(922원) ▶반도체(918원) 순이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수출액은 244억800만 달러(약 26조9000억원)로 전년 대비 7.6% 감소했다.

 일본 기업들은 엔저의 기쁨을 맘껏 누리고 있다. 이날 오후 샤넬·에르메스·구찌 같은 명품 브랜드와 백화점이 밀집한 긴자의 주오(中央) 거리에선 일본어보다 외국어가 더 많이 들렸다. 한 손에 대형 여행용 트렁크, 다른 한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든 40대의 중국인 관광객은 “새로 산 트렁크에 샤넬 가방 2개, 페라가모 구두 3켤레, 일 제 토토(TOTO) 비데 3개를 사서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넘쳤다”고 말했다. 게 요리집 ‘가니 도라쿠’ 점원은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 저녁도 손님의 80%가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 도쿄 출장을 다녀온 회사원 김제국(39)씨는 “웬만한 가게마다 중국어를 하는 점원이 있었다. 10년 넘게 일본 출장을 다녔는데 지난해 가을만 해도 볼 수 없던 풍경”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말 결산 결과 일본 상장사의 경상이익은 평균 6% 늘었다. 사상 최대 규모다.

 국내에서도 일본 상품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 온라인몰 11번가에선 최근 한 달간 일본 여행 상품 판매가 6배로 뛰었다. 일제 캐릭터 상품, 화장품 판매도 31~52% 늘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구두 편집매장에서는 일본 브랜드 ‘넘버21’이 입점 3개월 만에 20여 개 브랜드 중 5위에 올랐다. 신세계 장문석 바이어는 “가격이 비쌌던 일본 브랜드가 국내 제품보다 5만~15만원까지 저렴한 가격대에 나왔다”고 말했다.

한편 롯데백화점 본점의 유커 1인당 평균 소비액은 2013년 90만원에서 올해 1~4월 58만원으로 줄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경제동향간담회에서 “수출 부진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전수봉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과거 엔고 시대를 이겨낸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며 “사업구조를 효율화하고 제품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종석 홍익대(경영학) 교수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정하면 악수(惡手)가 될 것”이라며 “환율의 영향을 덜 받도록 정부가 제조업·수출에 치우친 산업 구조를 서비스업·내수 위주로 재편하는 ‘산업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구희령·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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