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문화계(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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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종명은 방인근이 경영하던 「조선문단」 에 채만식· 계용묵과 함께 등장한 젊은 작가인데, 미국「오·헨리」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경묘한 필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김유경은 어떻게된 인연에서인지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종명이 보성고교 출신이므로 혹시 학교 동창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매우 친근한터여서 자주 매일신보 학예부로 놀러 봤었다.
김유경은 영화감독인데, 본영이 김철이였다.「서울키논라는 영화사를 만들어 『유랑』 이니, 『지하촌』 『화륜』 『혼가』 같은 좌익색채를 떤 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좌익에서 신진 영화감독으로 날리고 있었는데, 어찌된 까닭에서인지 그쪽과 떨어져 이종명같은 소부르 작가와 가까이 지냈다. 두사람이 술은 별로 못하지만 이종명한테 끌러 그 둘과 나는 자주 청진동 골목 속에 있는 앉은 술집에 드나들었다.
이종명은 술을 한 두잔밖에 못하는 터이지만 이런 술집을 많이 알았고, 주도·색도에도 녹녹치 않은 관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청진동 술집에서 그는 우리도일본의 신흥예술파와 같이 프로문학에 대항하는 단체를 하나 만들어 보는게 어떻겠느냐고 이야기를 꺼냈다. 두사람은 이미 숙의하여 온 눈치로 김유경이 꼭 그런 단체를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나도 좋다고 찬성하고, 이야기는 진전되어 두 사람은 회원은 누구누구가 좋고, 어떤 방식으로 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보안을 이야기하였다.
당시의 4개 신문사 학예부 진용을 본다면 동아일보는 서항석이 학예부장이었고, 조선일보에는 홍×문, 중앙일보에는 이X준, 그리고 매일신보에는 내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4개 신문사 학예부 관계자를 넣기로 하여 동아일보에서는 기자는 아니지만 객원인 작가 이무영을 점찍고, 조선일보에서는 학예부 기자인 시인 김기림, 중앙일보에서는 부장인 소설가 상어 이X준, 그리고 매일신보에서는 나를 후보자로 뽑았다. 이렇게 신문사 학예부 관계자를 우선 점찍은 까닭은 우리들이 선전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카픈 측에서 그 당장에 소부르의 반동집단이라고 욕설을 해올 것이 틀림없고, 그때 이에 대한 반박문을 쓴다든지,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우리단체의 순수문학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신문 학예면을 끼고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찌기 좌익편에 들어 그때의 경험을 살린 김유경의 발언이였다. 수긍할 수 있는 착상이었다.
다음으로 또 한가지 신문사 학예부 관계자를 망라한 이유는 당시 각 신문사 학예부의 섹트주의를 타파해 문인들의 집필 범위를 넓히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요새 신문에도 그런 색채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때에는 이 섹트주의가 노골적이어서 어느 신문의 단골 집필자는 다른 신문에서 원고를 실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인들의 수입이 그나마도 더 적어졌으므로 학예부관계자가 한 그룹이 된다면 이 페단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종명의 복안이었다.
이것이 대개 1933년,5,6월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4개 신문사 학예부 관계자 4명과 이종명·김유경을 합하면 6명이 되고, 그 외에 이호석과 정지용을 꼭 넣어야 한다고 해서 모두8명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문제가 없고 정지용과 이X준의 참가여부가 문제여서 나보고 두 사람을 만나 타진해 달라고 하였다.<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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