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텔링] 둘째 임신하고도 하우스 갔지, 난 20년 ‘타줌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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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원. 서른셋이던 20년 전 박상두(가명)에게 이 돈을 건넨 게 화근이었다. 박상두는 자신에게 투자하면 월 10%씩 이자를 쳐주겠다고 했다. 당시 남편은 다니던 무역회사가 망한 뒤 배달일을 하고 있었다. 월급은 8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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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이자만 받아도 월 100만원인데…’. 어떻게든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식들에게 가난의 민낯을 보여주기 싫었다. 돈과 차용증을 건넨 건 7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하지만 박상두는 이자는커녕 원금도 돌려주지 않았다. 6개월 넘게 드잡이를 했다. 욕설과 주먹이 오갔다. 처음 경찰서란 곳에도 갔지만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되레 쌍방폭행으로 벌금만 내야 했다. 박상두의 집에 차압 딱지를 붙여본들, 돈을 찾긴 어려울 것 같았다. 박상두가 말했다. “니 줄 돈 없다. 대신 나랑 같이 대방동 하우스 가서 셈을 까자.” 돈 대신 도박판에서 쓰는 칩으로 준다는 얘기였다. 그게 20년 도박판 삶의 시작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소위 ‘타줌마(타짜 아줌마)’가 돼 갔다.

 둘째가 배 속에 들어선 때였다. 남편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길바닥에서 애 낳을 거냐, 이 여편네야.” 그래도 어느새 발길은 하우스를 향했다. ‘뿔딱지·바카라·딱지·박카스…’. 도박판에서 쓰는 은어를 들으면 가슴이 쿵쾅댔다. 내게 화투판은 늘 새로웠다. 하우스는 보통 33㎡(10평) 크기의 방에 차려졌다. 커다란 국방색 담요가 깔려 있다. 그 위로 새빨간 화투장과 시퍼런 지폐들이 뒤엉켜 섞인다. 타짜 10여 명의 욕망도 담배연기 속에 얽히고설켜 있다. 50~60대 주부, 타줌마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주종목은 ‘20장’이라는 화투놀이였다. 4명이 화투 피 5장씩 나눠 갖고는 ‘끗발’이 가장 높은 사람이 판돈을 다 챙기는 도박이다. 판돈의 10%는 주최 측(도박단 관리자)이 가져간다. 운이 좋으면 1분 만에 100여만원을 딸 수 있다. 주최 측의 돈으로 판에 끼어드는 ‘대타(바람잡이)’의 역할도 중요하다.

 돈을 잃은 사람들은 옆에서 수백만원씩 잃는 대타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말빨’ 좋은 대타들은 도박판의 흥을 살린다. 돈을 다 털린 노름꾼 ‘김씨 아저씨’가 주최 측에 두들겨 맞아 질질 끌려나가도 사람들은 힐끗 쳐다만 볼 뿐이다. “차비만 줘. 제발 차비 10만원만 좀 줘!” 김씨 아저씨의 비명에도 꾼들은 꼼짝하지 않고 자기 손에 쥔 패만 들여다본다. 나 역시 대방동·번동·청량리동 등 수많은 하우스를 오갔다. 좀 뜸하다 싶으면 도박판에서 알게 된 타짜들이 수시로 연락을 했다. “오늘 면목동에서 현장 칠 건데(도박판이 열리는데) 봉봉 올래?” 참, 봉봉은 여기서 불리는 내 별명이다. 봉봉 음료수를 사 가서 붙었다.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몇 번 있다. 하지만 묻히는 게 더 많다. 경찰 단속이 강화되면 될수록 단속을 피하기 위한 장치들도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도박 하우스 앞 폐쇄회로TV(CCTV)가 골목을 샅샅이 비추면 거실에 있는 TV를 통해 바깥 상황이 생중계된다. 경찰의 낌새라도 보이면 망을 보는 속칭 ‘박카스’가 외친다. “다구리 뜬다(경찰이 온다). 판 접어.” 그러면 화투판이 금세 치워진다. 우리끼리 ‘민방위(훈련)’라고 한다. 수표는 번호만 적고 찢어서 화장실 변기에 버린다. 돈이 오가는 현장을 덮치지 못하면 경찰도 어쩔 수 없다. “왜 이래요. 우리끼리 술 마시고 그냥 노는 건데….” 이 한마디로 끝이다. 수천만원을 잃어도 중독자들은 도박장이 없어지길 원치 않는다. 내부고발자도 거의 없다. 공권력의 사각지대다. 매년 1400여 명씩 타줌마들이 잡힌다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판에서 영원히 발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 4월이다. 번동 하우스 ‘지섭이네 집’에서 보름 동안 1500만원을 날렸다. 구력이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주최 측이 장난질을 친 게 분명했다. 홧김에 판을 뒤집었다. ‘딱지(칩 바꿔주는 역할)’ 지섭이가 나를 몰아냈다. 돈가방으로 맞고 발로 차였다. 팔 인대가 늘어나 깁스를 했다. 그날은 이상하게 서러웠다.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25년 전, 첫째를 임신한 나를 차에 태워 드라이브 가던 남편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내겐 1000만원의 빚만 남았다. 형제자매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도 저당 잡혀 날아갔다. 남편과도 서먹하다. 두 아들이 결혼 때까지는 이혼은 않기로 했다. 아들이 전화를 걸었다. “엄마 때문에 불안해 죽을 것 같아.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어버이날에도 집에 안 오는데.”

 전화기를 쥔 손에 생긴 멍이 가시질 않았다. 흘러간 시간의 자국만 얼굴에 선명하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경찰서로 향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 폭행 사실을 다 털어놨다. 부끄러움을 뱉어내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채승기·임지수 기자 che@joongang.co.kr

※이 기사는 ‘타줌마’ A씨(53·여)와의 인터뷰와 A씨가 서울 동대문 ·강북경찰서에 신고한 내용을 토대로 그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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