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새시대는 민간우호 바탕위에|대담 기전위 <동경도립대 명예교수> 김달수 <재일작가·사학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한국과 일본, 숙명적인 이웃이면서도 가깝지만은 않았던 두나라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로 이 두나라 사이에 새시대의 문이 열렸다고들 한다. 과연 한일관계는 새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오랜 역사속에 은수를 맺어온 두 나라의 관계를 결정한 조건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지금 과언 바뀌고 있는가. 일본에서 한국사학의 원로로 꼽히는「하따다·다까시」(기전위 ·동경도립대 명예교수) 씨와 재일작가며 사학자인 김달수씨 (65) 외의 대담을 통해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다듬어 본다. <편집자>
▲김=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기전=오랜만입니다. 김선생을 보면 내가 태어난 마산생각이 납니다. 김선생의 고향인 창원과는 20리정도 떨어진 곳이었지요. 지금도 마산의 어린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그런 말하면 안된다는 충고까지 받았읍니다만.
▲김=얘기는 역시 전대통령의 방일에서부터 풀어 나가야겠지요.
전대통령을 맞은 일황의 발언가운데 일본의 국가형성시기를 6∼7세기로 끌어 내린데는 놀랐읍니다. 획기적인 발언이예요.
지금도 일본교과서는 모두 4세기라고 가르치고 있지요. 4세기에 야마또 (大和) 조정이 한반도에 진출해서 반도남부의 미나마(任那)를 지배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일황이 이를 부정했어요. 일본의 역사를 2백년이나 뒤로 미룬 것이지요.
▲기전=그 발언이 나온 경위는 잘 모르지만 잘한 일이예요. 다른점에 대해서는 불만도 없지 않지만 그 부분만은 좋은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학계에서도 가장 새로운 의견이지요. 소수파의견이기도 하구요.
▲김=전에「이노까미」(井上光貞) 「나오끼」(直木孝次郎)씨등의 심포지엄 내용이『국가성립의 수수께끼 (미) 』란 제목으로 출판됐는데 거기서도 일본의 국가형성시기를 6세기로 잡았어요. 6세기라한것도 획기적이라 생각했는데 일황이 6∼7세기라고 한것은 예상밖이예요.

<임나지배설을 부인>
▲기전=누가 건의했을까요.
▲김=내각이 아닐까요. 「나까소네」(中曾根康弘)수상이 그 문제를 꽤 공부하고 있어요.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때도 만찬회에서 고대사에 관한 얘기를 했고요. 말하긴 뭣합니다만 내책도 읽고 그때문에 조용히 만나 얘기한 일도 있어요. 그것이 어떤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어쨌든 대단한 결단을 내렸어요. 그런데 신문들은 그점을 별로 주목을 안하더군요.
▲기전=일본신문들이 공부를 별로 안합니다.
▲김=일황이 이같은 발언을 한것은 신화시대부터 시작되는 일본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작용한것 같아요.
선생이 늘 지적하시는대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멸시·편견의 근원의 하나는 고대사에서부터 시작되는것 아닙니까.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얘기말입니다. 이것이 전후 교과서에서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런 만큼 일황의 발언이 중요하지요. 그런 점에서는 한국민에게 사과했다는 뜻도 되지요.
▲기전=그것은 과연 김선생다운 해석입니다. 그런데 솔직이 말해 한국에서는 일황의 발언을 중시하는 듯 하나 일본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무시는 못하지만 정치적 발언은 할수 없어요. 상징적 존재니까요.
얘기가 비약합니다만 나는 이번 일황 말에 기대를 가져도 안되고 이것으로 한일관계가 정리됐다고 봐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좀더 구체적인 문제, 예컨대 교과서 기술문제를 어떻게 할것인가, 일본에 있는 한국인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안돼요. 물론 그 전제로 일본이 확실히 사과를 해야 하구요. 「유감」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사과가 되는지 몰라도 상식적인 얘기로는 사죄가 아니예요.「불행」이라는 말도 어느 쪽이 불행했다는 얘기인지 주어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는『일본서기』 (720년에 완성된 일본사서, 일황가계를 신격화하고 고대사의 많은 사실이 왜곡돼 있다)이래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생각이 계속돼 오고 있다는 점이예요. 물론 문화적으로 한국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인정하고『일본서기』에도 그런 얘기가 나와요.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때는 꼭 이 얘기가 나와요. 막부(강호막부말기)에 정한론이 나온 배경에도 이런 인식이 바탕을 이루었지요. 식민지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요..
▲김=그렇습니다. 을사보호조약때 일본공사였던 「하야시·곤스께」가『나의 70년을 말한다』는 전기를 남겼는데 거기서도 한일합병에 대해 같은 사관을 피력하고 있어요.
▲기전=에도(江戶)시대에는 한일간에 우호관계가 계속 됐다지만 역시 한쪽에는 그런 생각이 연면히 이어져 왔지요. 이른바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막부에 한꺼번에 터져 나왔지요.
한일관계의 기본구조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고대 한일관계의 문제는 바로 현대 한일관계의 문제이고 지금 당면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한론" 의식 잔존>
일황의 발언이 있었다고 하지만 일본인들의 머리가 과연 바뀔지 의문입니디.
▲김=그래도 일황의 발언은 대단한 것이지요. 우선 학교에서 특히 지방학교에서는 고대사부분을 가르칠때 일황이 이런말을 했다는 것을 얘기할게 틀림없어요.
▲기전=지방학교에서는 그럴지 모르지요. 그러나 학자들은 안바뀝니다. 꽤 진보적인 학자들도 좀처럼 편견을 버리려 들지 않아요. 민족문제라는 것은 진보적이다, 뭐다 하는 것과는 좀 다른면이 있는것 갈아요.
▲김=많이 바뀌었지요. 저는 이미 일본에 50년 이상 살고있으니 잘 알수 있어요.
▲기전=거기에는 김선생의 공이 크지요. 고대사에 관한 김선생의 주장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요. 국민운동을 일으켰다고 할수 있어요. 대단한 일을 했읍니다.
▲김=천만에요. 다만 덕분에 귀화인이란 말은 없어졌지요. 귀화라는 말은 멸시의 뜻이 담겨있어요.
▲기전=한일관계는 역사상 파란도 많았지만 이웃나라로서 두나라만큼 우호적으로 지낸 예도 세계적으로 볼때 드물다고 할수있지요.
에도시대만해도 3백년가까이 우호관계를 유지했어요. 세계에도 그런 예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그 정신적 배경은「도요또미·히데요시」의 한반도침공에 대한 반성과 유학에 대한 존경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만.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의 정치고문이었던「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라는 학자는 포로로 잡혀온 姜沆이란 학자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지냈는데 조선침략이 잘못됐다는데 대한 인식이 두사람을 가깝게 했지요.
▲김=대마번의 번주종씨는 원래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으로「고레무네」 (椎宗) 란 성을 썼는데 이조와 친하게 지내려고 추자를 떼어버리고 종씨로 성을 바꾸었어요. 에도기의 학자 「후지이·데이깐」(藤井貞幹·『충구발』의 저자)도 같은 이유로 성을 바꾸어 등정간이라고 고쳤어요.

<에도시대 우호기억>
▲기전=당시의 일본무사들은 이조의 사신으로부터 자식의 이름까지 지어 받으려 했어요. 이같은 국민간의 존경이 우호관계의 기초가 됐다고 할수 있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라는 것이 저류에 이어져 내려왔어요. 국학이란『일본서기』를 그대로 신봉하는 것으로 막부의 정치에는 직접 영향을 안 미쳤으나 막부·명치가 되자 표면에 나타나게 되지요.
흑선이 앞바다에 나타나자 일본은 위기감에 휩싸였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지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탈아, 즉 구미를 모델로 근대화를 이루하고 이웃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되는데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 정신적 배경이 된 것이 국학이예요.
명치 이후 지금까지 이어오는 일본 지도층 생각의 큰 흐름은 한 갈래가 탈아이고, 다른 갈래가 흥아라는 것이지요. 흥아는 아시아를 일으킨다는 것인데 아시아를 일으키는 것은 좋으나 그 맹주는 일본이라는 것이지요. 탈아·흥아가 차례로 제기되어 일본의 정책을 이루어 온 것입니다.
한일간의 우호관계는 국민간의 교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문체는 정부레벨의 정책이 바꿔는 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정부레벨의 교섭을 안믿어요. 에도시대에는 한국인을 존경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명치시대에 오니까 이것이 바뀌거든요.
정치는 정책이니까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따라서 바뀔 수가 있어요. 이점은 앞으로의 한일관계에서도 주의해야해요.
「나까소네」수상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그대로 된다고 봐서는 안돼요. 일본정부태도는 수시로 바뀝니다. 교과서 문제에서도 보지 않았읍니까.
문제는 일본인들의 기본전인 생각이 바뀌느냐에 있어요. 고대사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편견 말입니다. 이것을 고치려면 교과서부터 바로 잡아야 해요.
전대통령의 방일이 좋았다고 보지만 걱정이 있어요. 대통령 방일로 모든 책임이 끝났다, 모든 것이 정리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거 안돼요. 일본인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는것 같아요. 과거가 다 정리됐으니 이제는 실력대로라는 얘기지요. 그러나 문제는 어제부터예요. 시작이라고 할수 있지요. 국민적 이해를 넓혀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김=정부간 교섭으로 우호관계가 생길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옳은 얘기입니다. 역시 민중레벨의 교류와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일간에 왕래가 느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지요. 지금 일본인으로 한국 가는 사람이 연간 40만∼50만명, 한국인으로 일본 방문하는 사람이 아마 20만명 수준이지요. 이것 대단합니다. 또 선생의 노력으로 NHK방송에「안녕하십니까」란 한국어강좌가 생긴 것도 중요한 일이구요.
한국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이란 노래를 들어 문화침략을 걱정한 사람이 있읍니다만 이는 신경과민이예요.

<학술·문화교류 중요>
가요곡을 가지고 문화침략 운운할 필요는 없어요. 교류를 넓혀야해요. 다만 영화는 좀 문제가 있을것 같더군요. 무자비한 살인극이나 포르노영화 같은 것은 곤란해요. 그러나 학자들간의 높은 레벨의 교류는 꼭 필요해요. 학생들간의 교류, 특히 유학생이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학여행이 느는 것등은 반가운 일이지요.
▲기전=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으면 합니다. 일본의 경제·역사·문학등에 대해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좋은 점, 나쁜 점을 가려내는 것이 필요하지요. 일본학회 같은 것이 생겨도 좋겠구요.
이해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것 아닙니까. 일본의 조선사학회에는 회원이 4백명이나 있읍니다. 그중에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이 1백명은 됩니다. 한국사람도 일본사에 대해 논문 발표할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막부에 준황양이를 부르짖으면서도 양이를 위해서 외국의 좋은 것을 배우겠다고 한 논리, 이것이 바로 일본다운 점이지요.
▲김=한국이 양이 일변도로 나간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그 배경에는 유교가 있다고 봐요. 한국은 유교적 체질을 벗어나지 않으면 근대화되기 어려워요. 서비스가 나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유교적 사고방식이거든요.
▲기전=일본에도 유교가 들어왔지요. 무사도는 바로 유교예요. 그러나 한국의 유교와 일본의 유교는 다른 점이 있어요.
막부의 유자는 서양문화를 계속 받아들였는데 한국의 유자는 이를 모두 배격했어요. 하긴 일본은 좋다는 것은 모두 흡수한데 비해 한국은 택일적이었지요. 【정리=신성순 동경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