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54)조용만-최상덕과 최학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최상덕은 독견이라는 호를 가진 소설가다.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상해 등지를 유람하다가 서울에 돌아와 잡지 『신민』에 관계하고 있었다. 『신민』이란 잡시는 이각종이라는 사람이 소문으로는 총목부 내무국에서 나오는 돈으로 경영한다는 말이 있었고 개벽사에서는 잡지 이름인 『신민』을 『신부민』에서 「부」자를 뺀 것이라고 야유하던 것이 기억난다.
「신부민」이란 말은 새로 일본 국민이 된 백성이란 뜻으로 조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잡지의 편집은 나산 김영진이라는 유명한 시조시인이 주관하고 있었는데, 1924년께 시작해 꽤 오래 계속된 종합시사 잡지였다. 『개벽』은 천도교에서 발행해 온 종합 잡지로서 『신민』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독견 최상덕은 어떻게 조선일보에 연줄을 대어 한기악 편집국장의 호의로 장편소설 『승방비곡』을 연재하게 되었는데, 이 소실이 의외의 인기를 끌어 신문이 많이 팥렸다. 그때 신문소설의 왕자는 춘원 이광수이어서 동아일보는 춘원의 연재소설로 다른 신문을 압도하고 있었다. 신문소설의 인기를 결정하는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화류계 여성들이었다. 기생들의 입을 통해 아무개 소설이 재미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소설은 히트하는 것이다. 독견의 『승방비곡』은 이런 화류계 여성들의 입으로 재미있다는 소문이 퍼져 인기를 끌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독견은 『승방비곡』에 이어 『난영』을 또 집필했고 중외일보 학예 부장이 되었다가 이익상을 따라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못가 무슨 사건 때문에 매일신보를 그만두고 1935년 동양극장 지배인이 되었다.
독견의 후임으로 그 아래 있던 서해 최학송이 승진해 학예부장이 되었다. 서해는 함북 성진 사람으로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하고 고아가 돼 북간도 각지를 유람하면서 막노동을 해 생활하였다. 그러면서도 문학에 열을 울려 일본의 현대문학 작품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춘원과는 일찍부터 편지 왕래가 있었는데, 서해에 대해 춘운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바로 「조선문단」을 하던 때였읍니다. 어떤 날 서해한테서 서울로 올라갈 터이니 모든 편의를 보아 달라고 하였기에 오지 말라고 편지를 했더니, 어떤 눈 많이 오던날 무섭게 생긴 장정 하나가 우리 대문 안에 나타났읍니다. 「제가 최서해올시다」하기에 나는 바라보고 약간 놀랐읍니다.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키가 작고 몸이 가는 얌전한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키가 크고 몸이 굵고 시커멓게 생긴 장정이었읍니다. 더우기 그때 옷은 거지옷보다 좀 나을지요, 퍽 참혹했읍니다. 그는 장작을 패든지 무엇이든지 할 테니 집에 있게 해달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나는 그를 어떤 절간으로 보냈읍니다. 내 옷 한 벌을 입히고 또 한 벌을 싸 주어 보냈지요. 그래서 서해가 「탈출기」를 그곳에서 썼읍니다.』
이렇게 해서 서해의 걸작인 『탈출기』가 나왔는데, 이 작품는 1925년 2월의 『조선문단』에 발표돼 초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히게 되었고, 서해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 대해 춘원은 다음과 같이 다른 각도에서 격찬하였다.
『그 건실한 품, 강력한 품, 선의 굵은 것은 「고리키」의 작품에서 받는 것 같은 어떤 압력을 받는 것이다. 세기말적·연애물적 문학에 빠졌던 청년들은 이 「탈출기」에 의해 문학의 새로운 감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문학은 결코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피를 기록한 인간의 전고투의 기록이 아니면 안된다 라는 신문학관을 젊은 청년에게 가슴 깊이 새겨 주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