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초 로비 스캔들 휩싸인 워싱턴 정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의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47)가 유죄를 시인하고 검찰 수사에 협조하기로 하자 백악관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에게서 받은 6000달러를 반환하겠다고 4일 밝혔다. 백악관은 지난해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후원금으로 받은 이 돈을 미 심장협회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그를 모른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여러 리셉션 등에서 아브라모프를 대면했을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미 언론은 불똥이 부시 대통령에게 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해선 지난해 5월 가봉의 독재자 오마르 봉고온딤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아브라모프의 로비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있다. 당시 그가 가봉 정부에 정상회담 주선 대가로 900만 달러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로비를 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워싱턴 정가는 지금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 그의 말에 상당수 정치인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 기부금 반환 러시=아브라모프는 대규모 회계부정 스캔들에 휘말렸던 타이코 인터내셔널을 위해서도 로비를 했다. 또 파트너인 마이클 스캔런과 함께 인디언 부족에게서 8000만 달러를 받고 그들의 카지노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뛰기도 했다. 그리고 이 돈의 일부를 상당수 의원에게 살포했다.

그런 그가 유죄를 인정하자 유력 정치인들이 줄줄이 받은 후원금을 돌려주겠다고 나섰다.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공화)은 지난 4년 동안 받은 5만7250달러를 자선단체에 내놓겠다고 3일 밝혔다. 밥 네이 하원 행정위원장(공화)도 같은 약속을 했다. 네이는 아브라모프에게 자신의 사무실을 이용하도록 했으며, 아므라모프는 그에게 선거자금을 주고 스코틀랜드 골프 여행도 시켜 줬다. 언론은 네이가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관심은 선거자금법 위반으로 이미 기소된 공화당의 실력자 톰 딜레이 하원의원에게 쏠리고 있다. 그는 1만7000달러를 받았고, 스코틀랜드 골프 여행도 했다. 이미 기소된 스캔런은 그의 수석보좌관 출신이다. 또 부비서실장을 지낸 토니 루디도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다. AP통신은 "검찰이 딜레이의 연루 여부에 대해 집중 조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밖에 존 둘리틀 하원의원, 콘래드 번스 상원의원 등 공화당 의원 20여 명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등 민주당 의원 6명이 그에게서 기부금 등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공화당 초비상=스캔들이 확산할수록 공화당 희생자가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은 벌써 '공화당=부패정당'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다. 공화당 자문위원인 리치 갤런은 "아브라모프와 무관한 공화당 의원들조차 중간선거에서 5~6%의 표를 잃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당 창당 얘기까지 나온다. 이번 스캔들에 민주당 의원 일부도 연루된 만큼 더 개혁적이고 깨끗한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 수 있다는 것이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 금지를 주장해온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 존 리버맨 상원의원(민주) 등이 중심이 돼 신당을 창당하면 폭발력이 있을 것이라는 게 일부 언론의 관측이다.

◆ 아브라모프는=공화당 정권에서 가장 잘나가는 로비스트였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부시의 최측근인 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 공화당 실세인 톰 딜레이와 가까운 사이다. 그는 존 애슈크로프트 전 법무장관이 현직에 있을 때 수차례 만났고, 딕 체니 부통령 측근과도 자주 어울렸다. 유대인인 그는 매사추세츠주 브랜다이스 대학에 다닐 때인 1980년 대선이 실시되자 로널드 레이건 당시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듬해엔 전국 공화당 대학생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공화당과의 인연을 깊게 맺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조지타운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변호사 활동을 하지 않고 영화계에서 종사했다. 반공영화 '레드 스콜피온'을 제작하는 등 10여 년간 일했다. 그러다가 94년 공화당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차지하자 워싱턴에서 법률회사에 취업했고, 로비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