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기의 일본 한국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나<하>|신영식<이화여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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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대의 한일관계는 선진국인 우리나라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어 그들을 개화시킨 것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일본인의 입장은 그들을 개발시킨 선진문화는 대륙문화로서 우리나라(삼국)의영향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어왔다.
한편 우리의 입장도 거의가 백제문화 (불교·유교·예술등)가 주로 일본의 고대문화인 비조문화를 이룩하였다는 정도에 머물러있었다.
물론 백제의 학자(왕인·아직기) 승려 (혜총·도장) 예술가 (아좌태자)등이 건너가 일본 고대문화를 형성시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국가형성과그 문화및 정치체제의 성립에 기여한 신라의 영향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막연한 일본문화의 개발자가 아니라, 당시의 정치정세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신라가 어떻게 일본국가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가하는 문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백제계영향 배제>
이것은 고대의 한일관계의 진상을 재조명하는 길이 될것이다.
고대 일본문화와 정치발전에 있어서 성덕대자(섭정기593∼622)와 대화개신 (645) 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주 일본 천황이 언급한바, 우리나라가 학문·문화·기술을 가르쳐 주었다는 6∼7세기의 모습은 바로성덕(쇼오또꾸)대자를 중심으로한 정치·문화척 개혁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관위제와 헌법의 제정, 일본사편찬, 그리고 견수사의파견등을 통해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꾀한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에 백제의 영향이 컸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기내에는 3백70여 이주외국인성씨가 있어 이들이 대화조정을 움직이고 있었다.
특희 고구려계의 48씨, 신라계의 10씨에 비해 , 백제계가 1백19씨나 되고있어 백제계의 영향력을 배제하지 않는한, 그의 중앙집권화는 꾀할수 없었다.
따라서 성덕태자는 백제계의 소아씨세력을 억압시키기위해 비조의 판개궁에서 나랑의 반홍궁으로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가 집권하고 있던 시대에 백제에 사신을 보낸것은 4회에 불과하지만, 신라에는 7회나 되고있어 탈백제세력의 기도는 친신라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6세기후반에서 7세기초엽의 일본은 백제와 신라의 영향에서 좌우될 정도였다.
더구나 7세기초의 일본의 수사들은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수 없었으므로, 거의가 신라에 체류하다가 귀국하기 일쑤었다.

<신라관위제 도입>
따라서 진평왕(579∼632)때의 신라사회와 정치를 목도할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신라는 불교의 발전, 정치제도의 정비, 원광의 결사표에 나타난 국가관과 갈이 급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수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성덕의 입장에서는 603년의 관위제가 백제의 것보다 신라의 것으로 개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씨성제도 신라의 골품제를 모방했을 가능성이 큰것이며, 일본의 8색성에서 제1위가 진인인 것은 신라의 진골과도 연관이 된듯하다.
더우기8색성은 골품제의 8등급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도 높은것이다.
그러나 성덕의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진하승은 신라계 이주민이었다해도, 그의 삼국관계는 어느정도 평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잊지 않았다.
성덕을 도와준 고구려인인 환자(불교), 백제인인 (유교), 신라인인 진하승 (정치) 의 경우는 당시의 정치판도를 대변해 줄수있기 때문이다.

<김춘추도 도일>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는 645년 대화개신에서 절정을 맞는다.
대화개신은 성덕태자의 개혁을 계승한 것이며 율렬국가의 수립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663년의 백촌강참패와 672년 임신의 난을 거쳐 701년 대보율령의 제정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647년 (진덕왕원년) 에 김춘추의 도일이었다.
물론 『일본서기』 에는 인질로 표시되었으나, 그가 일본에 갈때는 고향현리등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춘추는 신라의 실력자로서 비담의 난을 진압한 직후의 일이었으므로 정치적개혁에 자문과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신의 주요 브레인인 고향현리등이 신라유학생이었음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학승들의 영향커>
신라에 파견된 유학생이나 유학승려들은 진평왕때 설치된 내성의 의미를 파악하였을 것이어서 그것이 궁내관을 낳게하였음은 물론, 대사인제도역시 신라의상사인·하사인의 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모방은 강력한 중앙집권에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무천황은676년에 견신나사를 파견하여 원효의 불교철학과 국가관을 흡수케하였으며 설총·강수의 수준높은 유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지배계급에 정신적 공백을 메울수 있었다.
특히 찬란한 신라의 불교문화를 백봉문화의 모델로하여 새로운 국가체제의 사상적 기저로 삼는 한편 신라유학생을 중심으로 701년에는 대보율령을 선정하는등 신라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이게되었다.
이어 703년(성덕왕 2년)에는 2백4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신라에 들어왔으며, 707년에는 5차에 걸쳐 신라에 유학생(승)이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이것은 당시 정치·문화의 절정기에 있었던 신라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욕구의 표시라 하겠다.
다시말하면 대화개신 이후 일련의 정치적 개혁과정에는 신라에 유학한 학문승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며, 신라의 찬란한 불교문화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는 일본고대국가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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