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비없고 화구 등도 제공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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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만주 장춘의 북한공산군후방법원 간호분대장에서 제대한 뒤 내가 5년동안 다녔뎐 북경의 중앙미술학원은 중공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다.
심양의 노신미술학교나 항주·상해등지의 미술학교도 이름이나 있었으나 이 학교만은 못했다.
52년 정월. 나는 이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제대후 앞으로의 방향을 잡지못해 방황하던 나는 미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한국인이면서 중공 국적을 갖고있던 친구가 이 학교를 일러주었다.
중국말을 잘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북경으로 갔다. 군복을 입읕 채였다. 내게 옷이라곤 외춘병원 근무때 입었먼 군복밖에 없던 때였다.
입학시험은 그 전해 9윌에 이미 끝나있었다. 나는 난감했다.
그러나 나는 간단한 작품 심사만으로 입학이 허가됬다. 그동안 틈틈이 습작했던 정물화와 자화상 4점을 선보였다. 군복을 입고 있던게 주요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학교는 제대병에게 호의적이었다.

<간부학생 대우받아>
북경에 함께 왔건 친구중엔 공대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어링때의 꿈이던 화가의 길을 갈 수 있게 된것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내가 속한 회화계엔 학생이 30명정도 였다. 이중 남학생은 10명 정도였다. 광동을 비롯한 전국에서 유학온 우수한 학생들로 모두들 공부에 옅심이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모두 특별대접을 받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들게 되있는데 학비는 없고 식비만 내게 했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은 그것도 면제였다.
그림공부에 필요한 화구 등 재료도 모두 학교에서 대주었다.
게다가 아르바이트도 많이 제공됐다. 나는 이른바 간부학생대우를 방아 출판사일을 거들고 월급까지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다.
이 미술학원은 원래 5년제였으나 미술요원의 수요가 늘고있던 때여서 정부에선 3년만에 속성으로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졸업생들은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곳에 배치돼 일했다.
나도 3년 뒤에 졸업했으나 1년 더 학교에 남아 미술사연구실의 「협력사업「 에 종사했다.
미술학원에서 만났던 중국여학생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남학생·여학생들이 서로 부끄러움없이 어울렸다. 팔장을 끼거나 어깨를 안고 교정을 걸어다녔다.
약혼한 학생들도 많았고 결혼한 학생도 있었다.
어린애가 있는 여학생은 어린애를 탁아소에 맡기고 학교를 다녔다. 상급생과 하급생의 관 계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내 눈앞에 전개됐다.
교수와 학생간에도 존경과 사랑이 함께 있었다. 강의 중간중간 쉬는 시간엔 교수와 학생이 과자를 먹거나 차를 마시며 담소했다. 무척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특히 중국남자들은 여성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 같았다.
국수를 만들고 만두를 빚는 등 취사도 당번이 도맡아 하는 가정도 많았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내겐 신기하고 경이로왔다.
내가 지금의 쳬코인 남편 「야로슬라브」를 만난것은 이런 분위기의 북경, 이 미술학원에서였다.
프라하의 공예대학을 졸업한 그는 체코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연구생으로 유학와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도자기를 만져봤으나 북경에선 그림과 판화에 몰두했다.
그와 나는 배구로 이어졌다. 나는 그때 미술학원 배구팀에 들어가 운동을 했다. 「야로슬라브」는 축구ㆍ 탁구·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스포츠맨이었다.
그가 우리팀의 코치를 맡게되면서 우리는 서로를 알게됬다.
그때 미술학원엔 서양여자들도 상당수 유학했다. 폴란드 여자가 4명, 불가리아 2명, 체코3명, 헝가리 1명등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도학생과 일본학생도 있었다.
이런 서양 여학생들이나 중국여학생을 제쳐놓고 무슨 연유로 그가 나를 눈여겨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
1m 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호남형인 「야로슬라브」 는 말수가 적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청년이었다.
서양남자가 한국여자에게 흥미를 느꼈다고나 할까. 중국여자들은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었으나 대체로 내 눈에도 여자다운 점은 한국여성만 못해 보였다. 서양사람들은 구애의 속도가 빠르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서양남자들은 기습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아 여자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엉겁결에 넘어가는 일이 많다고 서양남자와·연애를 했던 한 중국친구가 말한일도 있다.
아ang든 그는 나와 알게된지 정확히 1주일 뒤 사랑을 고백하고 구혼해왔다.
나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느낄수 있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연구실에서 일하던 나는 학교를 떠나 체육부란 신문사 일을 보았다. 체코정부의 결혼허가는 나왔으나 북한측 허가가 더디어져 우리는 결혼하고도 결혼식은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야로슬라브」 와 나는 그의 기숙사에서 합께 살았다. 그리고 나는 첫아들 「파벨」을 낳았다.
신문사일은 그때부터 그만두었다. 우리는 「야로슬라브」의 공부가 끝나는 대로 체코로 돌아갈 작정이였다. 나는 젖먹이 「파벨」을 키우며 체코에서의 생활설계에 마냥 행복했다.그리고 그날을 기다렸다.
틈나는대로 「파벨」을 옆에 앉혀놓고 그림용 그렸다.
프라하의 시부모님들에겐 커가는 「파벨」 의 사진을 부쳐드렸다.
행복한 가정과 나의 꿈 그림. 나는 이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자일수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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