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표준' 세계서 통했다 … 코드분할 휴대폰기술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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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12일 오전 2시, 서울 중구 남산의 그린빌딩 앞 거리.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는 고성이 남산을 뒤흔들었다. 당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사장이던 서정욱 전 과기부 장관이 직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밀리면 끝장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서 사장 밑에서 TDX(전전자교환기)와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 상용 서비스를 준비했던 이성재 당시 부장(RX윈도 사장)은 "10여 년간 서 사장과 일했는데 그때만큼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 한국이동통신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맞수 신세기통신은 기존의 아날로그통신을 고집했고, 통신학계는 유럽이동통신방식(GSM) 계열의 TDMA(시분할다중접속방식)를 선호했다.

언론계와 정부 부처까지 나서 CDMA와 TDMA를 놓고 치열한 이동통신 표준 논쟁을 벌였다. CDMA 방식을 일찌감치 채택한 한국이동통신은 당황했다. CDMA의 기술적 우수성을 보여줘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한국이동통신은 12일 오전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막되는 '95 정보통신전시관 행사'에 참석할 기자단을 태운 버스에서 CDMA를 시연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서 사장 일행은 11일 오후 8시부터 12일 새벽까지 남산 그린빌딩에서 코엑스까지 수차례 오가며 시험 통화를 했다. 한 번도 통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야 했으나, 중간에 수시로 통화가 끊기자 서 사장은 불호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날 낮에 기자단을 태운 버스가 그린빌딩에서 코엑스까지 가는 동안 버스 안의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SK텔레콤은 이듬해인 96년 1월 1일 서울과 인천 간 CDMA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CDMA 기술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되는 순간이었다. 국내에서 이처럼 세계시장을 이끈 '상용화 표준'을 만든 사례는 드물다.

개통은 1일 됐으나 CDMA 휴대전화 가입자를 모집한 것은 3일이다. 꼭 10주년이 됐다. 서 전 사장은 96년 말 펴낸 회고록에서 "극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나의 입장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되새기게 했다"고 썼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CDMA는 한국 정보통신 사상 최고의 효자가 됐다. CDMA에서 기술력을 축적한 삼성전자와 LG전자, 팬택계열 등은 CDMA는 물론 GSM 시장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이기태 사장은 "한국이 전인미답이던 CDMA 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었다"며 "만일 당시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선점하고 있던 TDMA 시장에 진입했더라면 한국의 이동통신 산업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고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 애니콜이 당시 세계 최강이던 미국 모토로라를 국내 시장에서 제압하는 데도 CDMA 상용화가 한몫했다. 96년초부터 삼성전자가 CDMA 단말기를 잇따라 출시하면서 그해 10월까지 CDMA 단말기를 만들지 못했던 모토로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지난해 한국은 모두 246억 달러어치의 휴대전화를 수출해 세계 시장의 22%를 차지했다. CDMA 상용화 원년이던 96년의 휴대전화 수출액은 4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10년 만에 무려 55배 늘어난 셈이다.

CDMA 상용화 과정에 참여한 SK텔레콤 이주식 상무는 "96년에 CDMA를 상용화하지 못했다면 98년께 이동통신 대란이 벌어졌을 것"이라며 "주파수 대역폭이 작은 GSM으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이동통신 가입자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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