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신년기획중산층을되살리자] 上. 왜 중산층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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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세 배가 넘었다.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의 부국이었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2005년 현재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10배가 넘는다.

한국과 필리핀-. 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가장 결정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중산층이라고 입을 모은다. 필리핀은 전체 인구의 85%가 빈곤층에 속한다. 상위 7%가 전 국토의 90%를 소유하고 있다. 내수 산업이 자랄 토양이 없었다. 반면 한국에선 60~70년대를 거치며 중산층이 내수시장을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탄탄한 내수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한국산 자동차.가전.철강이 세계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의 계층 구조는 예외없이 중산층이 두터운 '항아리형'이다. 반면 주기적인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을 겪고 있는 중남미 국가 등은 중산층이 얇은 '피라미드형' 계층 구조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한국은 기로에 서 있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념과 계층 간 갈등의 격화로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좌절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중산층의 균형자 역할=서유럽에서도 스웨덴은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반면 미국에선 냉전시대를 거치며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씨가 말랐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 갈등은 어느 쪽이 더 심할까. 연세대 김용학 교수는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 스웨덴의 계급 갈등이 훨씬 약한 것으로 나왔다"고 소개했다.

스웨덴에선 복지제도가 발달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반면 미국은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얇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중산층을 인정하지 않은 좌파 학계에서조차 최근엔 중산층의 이데올로기가 계급 의식의 충돌을 완화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희대 김민전(정치학) 교수는 "서유럽이 좌우 이념 대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도 좌파에서 중도 우파에 걸쳐 있었던 중산층이 때론 보수파와 연합하고, 때론 진보파와 손을 잡으며 어느 한쪽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견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구의 정치권이 타협과 절충에 익숙해진 것도 중산층이 두터웠던 덕분이란 것이다.

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노사 대립이 격렬한 양상을 띠고 좌우 이념 대립의 골이 깊어진 이면에는 중산층의 감소가 자리잡고 있다"며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다가오는 양대 선거에서 이념.계층 갈등을 완충할 강력한 균형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자본과 노동의 대타협=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정원호 박사는 "전통적으로 중산층이 두터웠던 덴마크나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자본과 노동이 대타협을 이뤄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이뤄냈다"고 말했다.

두 나라의 성장률이 유럽 국가 평균보다 높지만 실업률은 절반밖에 안 된 것도 노사 대타협의 결과라는 것이다.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노조 가입률이 80%에 이를 정도로 높지만 이들이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기 때문에 극단적 노사 대결을 막았다. 정 박사는 "분배 우선이냐, 성장 우선이냐는 이념 대결은 실체가 없는 공허한 논쟁"이라며 "중산층을 두텁게 복원하는 게 자본과 노동의 대타협을 이끌어내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위기는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이전 6만 건대였던 이혼 건수는 98년 11만6000건을 훌쩍 넘었다.

신용카드 거품으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급증했던 2003년엔 16만7000건까지 치솟았다. 이혼 이유 가운데 경제 문제의 비중은 95년 2%에서 98년 7.7%로 껑충 뛰었고, 2003년엔 27.4%로 무려 10배 이상이 됐다.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절도 등 경제 범죄가 크게 늘어난 것 역시 중산층 약화의 후유증으로 분석된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중산층의 좌절감이 큰 사회일수록 냉소주의와 무기력증이 확산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20~30대 사망 원인 가운데 자살이 1위로 올라선 것도 청년 실업 등 중산층의 좌절과 무기력증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 특별취재팀=경제부 정경민 차장(팀장).김종윤.허귀식.김원배.김준술 기자, 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정책사회부 정철근 기자, 산업부 윤창희 기자, 사건사회부 손해용 기자, 사진부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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