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가족] 부녀유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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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은 곳은 경사로였다. "아빠가 커 보이셔야 되는데"라며 사양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위쪽 자리를 기어이 양보한다. 명승건축그룹 이순조 회장과 건축학도인 딸 경은씨가 서울 역삼동 명승건축그룹 사옥의 ‘바실라(Basilla) 아트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바실라’는 경은씨의 세례명.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안성식 기자

이혼율 증가, 저출산 등의 현상을 놓고 가족 '해체'니 '붕괴'니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한 집 한 집 들여다보세요. 여전히 가족의 사랑과 믿음이 우리 삶의 원동력 아닌가요? 세상이 변하듯 가정도 변할 뿐 따뜻한 가족애는 영원하답니다. 우리 가정의 변화상을 다섯 회로 나눠 짚어봅니다.

딸을 낳으면 "누구랑 야구장 가느냐"며 아쉬워했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이젠 딸의 '단짝'이 됐다. 공기놀이를 같이 하고, 시시때때로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가업'을 딸에게 물려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존여비 문화를 없애자는 뜻으로 몇몇 신세대 아버지들이 '딸 사랑 아버지 모임'을 결성해 화제가 됐던 것이 불과 5년 전. "아들이 없으면 남편이 겉돈다"며 아들 낳기를 고집했던 시절까지 떠올리면 격세지감 그 자체다.

● 우린 단짝친구

회사원 이준석(42)씨는 초등학교 5학년 딸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자처한다. 딸과 놀기 위해 공기놀이도 연습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책도 함께 읽는다. 딸에게 인터넷 미니홈피를 꾸미라며 '스킨'과 '음악'도 종종 선물한다. 이씨는 "주변에선 '좀 더 커봐, 자기 방문 쾅 닫고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을걸'하며 겁을 주지만, 나는 평생 딸과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중학생 딸을 두고 있는 김진호(45)씨는 사무실 책상 앞에 지난해 4월 22일 중앙일보에 게재됐던 칼럼 '딸에겐 무조건 아빠가 필요하다'를 붙여 뒀다.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딸을 보자. 가까이 있거든 입 맞추고 안아주며, 멀리 있거든 전화라도 걸고, 문자라도 날리자. 그리고 그 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주 같은 아빠가 되어 보자'라는 문장에는 밑줄까지 쳐놨다.

결혼한 딸도 더 이상 '출가외인'이 아니다. 전업주부 변경미(35)씨는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의 전화가 부쩍 잦아졌다"며 "친척 경조사 등 집안 대소사를 상의하는 데 아무래도 딸이 며느리보다 편하신 모양"이라고 말했다. 결혼 10년차 회사원 정주영(38)씨는 종종 친정 아버지와 데이트를 즐긴다. "아버지가 회사 근처를 지나실 때마다 전화를 하세요. 점심시간에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가끔은 쇼핑도 같이 하죠."

● 최고로 밀어주마

부정(父情)은 이렇게 알뜰살뜰 정을 나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딸에 거는 기대도 아들에 못지 않다. 그 이면엔 사회 곳곳에서 거세진 '여풍(女風)'이 한몫한다. 남녀공학 중.고교에서 최상위권을 여학생이 차지한 지는 벌써 오래. 지난해 사법.행정.외무고시를 비롯해 변리사.공인회계사.세무사 등 주요 국가자격시험의 수석도 모조리 여성이었다. 딸에 대한 꿈을 키워갈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김석주(62)씨는 시집 간 둘째딸(29)의 대학원 박사과정 등록금을 대주고 있다. "치과의사인 딸이 앞으로 개업을 하더라도 박사학위가 있어야 유리할 것"이란 생각에서다.

아버지의 일을 딸이 물려받는 일도 자연스럽다. 명승건축그룹 이순조 회장의 딸 경은(23)씨는 미국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꼽히는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현재 런던 AA(Architectural Association)스쿨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음악을 전공하겠다던 딸에게 "건축도 음악이야, 응결된 음악(frozen music)"이라며 건축 전공을 유도한 건 아버지 이 회장. 지난해 초 대학 졸업을 앞둔 경은씨가 "1년만 쉬겠다"고 했을 때 "그러다 주저앉기 쉽다"며 만류한 사람도 이 회장이었다.

"제가 공학을 기반으로 한 건축을 한다면, 경은이는 미술의 연장선에 있는 건축을 하고 있죠. 제게 꼭 필요한 분야이기도 해요. 하지만 경은이의 활동 무대를 아버지 회사로 국한하고 싶지는 않아요. 세계 최고의 건축가가 돼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경기 부천에서 일식당 '하나스시'를 운영하고 있는 장재일(57)씨도 딸에게 '가업'을 전수했다. 장씨는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 아미가 호텔 등의 일식당 주방장을 역임한 베테랑 요리사. 딸 소영(31)씨는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지만, 8년 전 아버지의 권유로 요리공부를 시작했다. 소영씨가 처음 일식당에 취업했을 때만 해도 어려운 요리가 나오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조리법을 묻곤 했단다. 하지만 이젠 문화센터 요리강사로 일하는 소영씨가 아버지에게 힘이 된다. "강의가 없는 날엔 식당에 나와 일을 도와줍니다.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 애도 아빠가 키워줄게

딸의 사회생활에 최대 장애인 육아문제에도 친정 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나선다. 넉 달 전 둘째아이를 출산한 프리랜서 디자이너 김민영(32)씨는 지난달 친정에서 몸조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 살배기 큰딸만 데리고 왔다. "일하면서 애 둘을 어떻게 키우느냐"는 친정 아버지의 만류 때문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큰 손녀도 생후 1년 동안 키웠다. "아버지가 애 우유 먹이고, 목욕하고, 재우고 하는 일을 다 맡아 해주셨어요. 첫애 때만 해도 애 맡기를 부담스러워 하던 친정 어머니도 이번엔 아버지 믿고 흔쾌히 두고 가라고 하시던걸요."

전직 교사인 이현수(63)씨는 외손자를 키우기 위해 지난 2002년 정년을 3년 앞두고 명예퇴직까지 했다.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딸이 연년생 형제를 낳아 키우는 지난 3년 동안 1박2일 여행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이씨.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기기도 겁나고, 유학까지 다녀온 딸이 집안일에 묻히는 것도 싫었다"며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우리 딸만 최고?

아들이든 딸이든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그렇다면 최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유독 부각되는 이유는 뭘까. '딸 사랑 아버지 모임'의 천성관 총무는 "자녀를 '대 잇는 존재'가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면서 아들.딸을 동등하게 대하는 문화가 확산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박진생 정신과의원 원장은 "과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선 아들이 뭐가 됐느냐가 아버지의 '얼굴'이 됐지만 요즘 아버지들은 딸의 성공을 통해서도 충분히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바쁜 직장생활에 밀려 자칫 가족 내 '왕따'가 될 우려가 있는 아버지들에겐 딸과 친구처럼 주고 받는 수다가 구세주 격이다. 최근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황금부엉이)를 펴낸 장경근(52.영애드컴 미디어총괄본부장)씨는 "대학생.중학생인 두 딸이 남자친구나 아르바이트 같은 소소한 일상을 털어놓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장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기 딸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애정이 '남의 딸'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부작용도 있다. 중앙일보 패밀리리포터 곽희수씨는 "자기 딸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떠받들던 아빠들이 아들을 장가보낸 뒤 며느리를 무시하고 딸 편만 들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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