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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은 대국의식의 노예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부의 워싱턴 포스트로 평가받는 로스앤젤레스타임즈의 8월2일자 신문은 미국언론이 한국을 보는 한 단면을 읽게 했다.
한국의 레슬링선수 김원기가 일본보다 먼저 금메달을 딴 바로 다음날의 조간이다. LA타 임즈가 LA올림픽에 대비해 2백40명의 기자를 2년여에 걸쳐 재훈련시켜 야심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하루 44페이지에 이르는 올림픽특집판의 레슬링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남자 그레코로만의 체급별 메달리스트의 명단이 표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결승전은커녕 조별결승(준결승) 도 안 끝난 52㎏체급의 동메달리스트로 방대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금은 일본, 은은 노르웨이선수였다. 용케도 그날 하오에 있은 경기결과는 은만 빼고선 들어맞췄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원기가 금메달을 딴 62㎏체급의 메달리스트들의 명단은 그 표에서 빠져있었다. 기사를 읽어보니 금의 우승을 한줄로 보도를 하긴 했다. 그러면 그 표를 단순한 오보로 넘겨야 할 일인가. 페이지를 넘겨갔다. 야구란에 또 한국기사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전날밤 일본에 2-0으로 진 야구기사였다. 야구란의 머리기사로 한일전의 경기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LA올림픽이 개막되고 처음으로 한국에 베푼 호의가 그런 것이다.
ABC-TV는 어떤가. 올릭픽 개막식날 한국선수단의 입장식을 상업광고하느라 잘라먹너니 재미한국교민들의 항의에 뉘우치기라도 한듯 김광선과 「곤잘레스」의 격전을 단1초도 자르지 않고 재방영해주었다.
경기가 이런 식으로 재방영된 것은 지금까지론 처음의 일이다.
그 경기에서 우리의 금메달유망주였던 김광선이 .미국의 「곤잘레스」 에게 패배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1회전이었지만 그 체급의 결승전이나 마찬가지였던 빅게임이었으니 전 경기과정의 재방영을 이해할 수는 있다.
더구나 「곤잘레스」 의 대중인기를 보면 그렇게 함직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이광재 아나운서의 애국적 해설을 함께 듣고 있느라면 그런 선의의 해석을 하던 생각이 불현듯 달아나 버린다. 김광선이 난타당하는 모습을 다시 화면에 소상히 재생시킨 ABC-TV나, 금메달의 뉴스는 슬며시 구석진데 가려놓고 타력도 터지지 않고 실수만 연발한 한국의 야구 졸전을 상보하는 LA타임즈의 의식수준이 오십보 백보다.
더우기 당혹감을 느낀 것은 김원기의 보도가 묵살된 바로 그 날짜의 LA타임즈 ABC-TV의 올림픽보도자세를 호되게 나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을 읽고서였다. LA타임즈의 한 텔레비전 비평가의 기명으로된 이 기사는 ABC-TV를 보면서 느낀 한국기자의 감정을 어쩌면 그렇게 대변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TV를 켜면 언제나 미국국가가 홀러나오고 화면은 성조기로 뒤덮인다. 『미국은 지금 감격으로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60넌대 우리의 국영방송에서 많이 듣던 바로 그런 음성과 그런 내용의 소리다. 올림픽은 미국 혼자서 하는 것 같으며 미국만이 금메달을 따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한다.
오늘까지 11개국에서 50개의 금메달이 나왔다. 미국의 것을 빼더라도 28개의 금을 미국아닌 국가가 차지했다. 그런데도 미국아닌 딴 나라 선수의 금메달 수여 광경을 ABC-TV에서 본 기억이 안난다. 뿐만 아니라 결승전 경기라도 미국선수가 나가지 않는 종목은 거의 방영하지 않는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건 미국의 국내TV일세』 -이렇게도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온 지구의 고민을 혼자 안고 있기나 하듯 시시콜콜한 남의 나라 일까지 이래라 저래라 해온 미국의 언론으로서는 그런 말로는 설득력이 약하다. 이점에선 LA타임즈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ABC는 미국선수들만 소개함으로써 추악하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 주고 있다』 고 우려했다. 보긴 잘했다. 하지만 미국의 오만을 꾸짖고 있는 바로 그 LA타임즈에서도 한국의기자가 똑같은 오만을 느꼈다면 그건 느낀쪽의 잘못일까.
미국의 언론이 보이고 있는 대국주의적· 방자함을 신문에서, TV에서 매일매일 접해야 하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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