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그래도 제조업이다 - (上) 철강 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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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세계 3위의 중국 바오산철강은 연 1500만t의 각종 철강제품을 생산한다. 핫코일이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 [블룸버그뉴스]

한국 경제는 10년 뒤, 2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정보기술(IT).바이오기술(BT) 산업 등이 향후 한국경제를 이끌 신성장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지난 40년 그랬듯이 앞으로도 생산.수출.고용.투자를 통해 경제성장을 두루 이끌 견인차는 여전히 전통 제조업이라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우리의 전통 주력산업은 친디아(Chindia.중국+인도) 등 신흥개도국의 맹추격에 몰려 미래를 위협받고 있으며, 지난 20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을 따라잡기가 아직은 힘겨운 상황이다. 전통 주력산업 중 철강과 자동차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와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11월 말부터 열흘 일정으로 중국.인도.일본을 순회 취재한 내용을 上.下로 연재한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이 중국 상하이(上海) 포스코의 중국판매법인(POA)에 도착한 12월 1일.

1급 비상에 걸린 상태라 휴일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중국 최대 철강회사인 바오산(寶山)철강이 11월 중순 갑자기 철강제품 가격을 내린 여파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포스코 제품이 눈에 띄게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이태환 POA 사장은 "계약 물량이 지난해의 60%도 안 되는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고 한숨지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철강은 한 해에 10억t 정도다. 이 가운데 중국이 생산하는 철강만 3억t에 이른다.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이 된 중국의 입김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중국의 철강산업은 생산량에서뿐 아니라 기술면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의 80% 정도였던 기술이 이젠 몇 가지 고급 제품을 제외하면 대등한 수준으로 발돋움한 상태다.

12월 7일 오후 4시. 인도 최대 철강회사인 ㈜인도철강 뉴델리 본사.

철강 생산능력에서 세계 16위(연산 1200만t)인 이 회사는 2012년까지 80억 달러를 투입해 생산능력을 2000만t으로 늘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2020년까지 인도의 철강생산능력을 현재의 배인 연간 1억1000만t(우리나라 생산량의 2.5배)으로 늘린다는 정부 철강산업 선진화 계획의 일환이다. 철강에 대한 인도의 자신감 넘치는 포부는 인도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는 포스코에 대해 "우리는 세계 어느 기업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건전한 경쟁은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룽타 기획담당 이사의 말에서도 물씬 드러난다.

12월 9일 오전 11시. 일본 도쿄(東京) 신닛폰(新日本)제철 본사.

마루야마 다카시 기획담당 팀장이 접견실에 나와 취재에 응했다. 첨단기술이 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취재진의 공장 방문은 끝내 거부했다. "물량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지났다. 중국과 인도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과 제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술 경쟁력이라는 장벽을 높게 쌓으면 중저가 제품의 공세는 두렵지 않다."(마루야마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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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도에 웃고 우는 세계 철강업계=중국의 저가 공세로 인한 한국 철강업계의 타격은 이미 수치로 나타난다. 올 1~10월 중국에서 수입한 철강재(576만3068t)가 중국에 수출한 물량(396만6604t)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철강협회 국제협력팀 김성우 팀장은 "중국과 철강 무역을 해서 역조를 빚기는 사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세계시장에 쏟아내는 중저가 철강재는 이제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세계 유수 철강업계가 공통으로 앓게 된 병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 중국연구센터 심상형 연구위원은 "지난해 중국에서 완공된 철강 생산설비는 한국 총생산능력의 1.5배나 되는 7800만t에 이른다"며 "올해도 7000만t이 더 증설될 것"으로 추정했다.

중국산 덤핑 공세에다 인도의 설비증설 움직임도 범상치 않다. 포스코 인도사무소 도상무 소장은 "조만간 인도까지 철강 수출전선에 나서면 대규모 생산능력과 기술력이 없는 업체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 세계적인 업체들의 생존전략=신닛폰제철 마루야마 팀장은 "10년 후 살아남으려면 기술과 규모밖에 없다"며 "기술경쟁력과 생산능력 확대는 세계 철강업계의 2대 생존전략"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세계 굴지 업체들이 눈독 들이고 있는 것이 규모와 기술력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인수합병(M&A). 1999년 영국 브리티시 스틸과 네덜란드 휴고벤스가 통합한 데 이어, 2002년에는 프랑스 최대 철강사 유지노가 룩셈부르크 아르베드, 스페인 아세라리아와 합병해 연산 4600만t의 초대형 업체로 탈바꿈했다.

중국 정부도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수.합병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7월 '철강산업 발전정책'에서 "2010년까지 경쟁력을 가진 3000만t급 두 회사와 여러 개의 1000만t급 철강회사를 육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정책에 따라 합병 대상이 되는 수백 개의 영세업체는 생산량이 9900만t이나 된다.

일본의 신닛폰제철은 원가절감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고수한다는 계획이다. 종업원을 92년 5만여 명에서 지난해 2만여 명으로 줄이는 등의 피나는 구조조정으로, 99년 한국에 비해 t당 122달러 높았던 냉연강판 생산원가가 지난해엔 한국보다 56달러밖에 높지 않게 되었다. 신닛폰제철 마루야마 팀장은 "10년 불황 동안에도 매출액의 2%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이에 힘입어 일본 철강제품 중 70% 이상이 개도국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기술경쟁력이 강한 고부가가치 제품이 됐다"고 밝혔다.

◆ 한국 철강업계의 선택=철강산업은 단순한 '굴뚝산업'이 아니다. 향후 한국을 먹여 살려야 할 주력산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난해 생산량은 세계 5위(4750만t)이며, 1인당 철강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1인당 1t)이다. 양적인 면에서는 철강 선진국과 겨룰 만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극복할 과제가 많다. 일반제품의 기술은 세계 최고라는 신닛폰제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지만 자동차용 외장재나 내진 철강재 등 고급강 기술은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경쟁력 강화와 원료의 해외생산기지 확보만이 한국의 철강산업이 살 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포스코 재팬 장병효 사장은 "상품을 싸게 만들 수 있는 기술, 장기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원료, 독자적인 수요 기반인 단골고객, 이 세 가지를 갖춰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M&A 여건이 불리한 한국은 기술제휴나 자체 개발을 통해 기술력을 높여야 하는 오랜 숙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연구개발 노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다. 지난해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지출 비중(0.6%)은 일본(2003년 1.45%)의 절반도 안 된다.

중국과 인도 등 브릭스 시장의 수요급증으로 철광석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올 상반기에도 호주 등 원료 공급 업체들이 가격을 70% 이상 인상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 맞서 해외 광산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6월 인도 오리사 주정부와 30년 동안 철광석을 캘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2020년까지 연산 12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특별취재팀=중앙일보 경제연구소 이종태.임봉수 기자
▶포스코경영연구소 유승록.박경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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