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발전에 헌신한 "호남대들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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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고한 박인천 금호그룹회장은 운수업에서부터 시작, 무역·타이어·건설·금융·윤활유 등에 걸친 9개 계열기업을 일으킨 호남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해방직후 택시 2대로 운수업계에 투신, 지난 48년 현재의 광주고속 전신인 광주여객을 세웠고 아스팔트길이라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던 시절에 광주∼부산, 광주∼서울간의 장거리버스노선을 여는 결단력으로 일찍이 사업기반을 굳혔다.
이후 운수회사를 하다보니 타이어가 필요해 삼양타이어를 세웠고 다시 한국합성고무를 세우는 식으로 꾸준히 사세를 확장해왔다.
기업인으로서의 고박회장의 입지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
고 박회장이 택시 2대로 처음 운수업에 뛰어든 것은 40여년 간의 관직생활을 청산한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후 삼양타이어를 설립한 것은 50대, 한국합성고무와 금호실업을 세운 것은 60대에 들어서였다.
이처럼 40대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여 50대에 사업기반을 굳히고 내대에 기업그룹의 「총수」로 군림한 고 박회장은 흔히 『40대에는 20대의 정열로 일하고 70대에는 50대의 정력으로 일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곤 했다.
『사업이건 인생이건 첫째는 부지런해야하고 둘째는 끈기가 있어야한다』고 늘 강조하던 고 박회장은 뒤늦게 기업그룹의 총수가 되고서도 이같은 스스로의 교훈에 철저해 수행비서 1명도 두지 않았고 관청에 가면 일선 실무자들을 일일이 만나 일을 해결하는 겸손함을 지켰다.
나주에서 태어나 주로 광주에서 사업을 일으키며 기거했던 고 박회장은 지역사회와의 「유대」에 가장 각별했던 기업인으로 지역사회발전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고속을 일으켜 사업기반을 굳힌 후 자신의 2번째 사업인 삼양타이어를 설립하기도 전에 고 박회장이 먼저 착수한 것은 지난 59년 광주의 중앙여중·고 설립이었다.
이후 박회장은 교육법인인 죽호학원 재단이사장으로서 사업확장과 병행하여 73년에는 금호고등학교, 78년 금파공업고등학교를 각각 설립, 육영사업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사업에 대한 열성 못지 않게 2세 교육에도 일찍부터 정성을 쏟아 만년에는 이들 집안의 재목들에게 경영을 거의 맡기다시피 했다.
미국 예일대 경제학박사출신인 장남 성용씨가 현재 그룹의 부회장으로 있고 연세대를 나온 차남 정구씨는 삼양타이어와 광주고속사장, 역시 연세대출신인 3남 삼구씨는 금호실업사장, 미 아이오와주립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4남 찬구씨는 금호화학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고있으며 사돈인 이정환 전재무장관도 현재 한국합성고무 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은 아침산책과 검소한 식사로 건강을 유지했던 고 박회장은 재계원로중 고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과 두터운 교분관계였고 최근까지 김용완 전경련 명예회장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광주에 머물 때는 아침 일찍 무등산에 오른 뒤 광주고속의 첫 번째 출발차를 확인하곤 하던 고 박회장은 틈이 나면 불도와 바둑에 심취할 때가 많았고 금호그룹의 2세 경영인들에게도 평소 불심에서 나온 마음의 안정을 가르쳐왔다고 한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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