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미국 정치 양극화가 중국 주도 AIIB 키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손인주
홍콩대 국제정치학 교수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칩 펠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로 인해 워싱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의 외교적 실패에 대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지난해부터 워싱턴에서 만난 아시아통들은 대체로 ‘미국이 반대하든 지지하든 AIIB의 출범은 불가피하다’고 예측했다. AIIB 창설 과정에 미국이 적극 참여해 중국과 함께 게임의 룰을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왜 오바마 행정부는 AIIB 참여를 반대하다가 이렇게 체면을 심하게 구기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당파성에 휘둘리는 워싱턴 국내 정치다. 미국의 AIIB 참여를 의회가 승인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즉 애초부터 오바마 행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정책 옵션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AIIB가 글로벌 규범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비판뿐 아니라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딴지를 걸겠다는 정파적 대립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미국 의회정치에 관한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브루킹스연구소의 토마스 만 박사는 “현재 미국의 당파정치는 남북전쟁 이후 최악이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접하는 공화당·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적대적 언어는 도를 넘어간 듯하다. 정당 양극화의 덫에 걸린 미국은 과거와 같이 장막 뒤의 타협에 의한 유동적인 정책적 연합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 양극화는 중국에 더 많은 외교 공간을 열어주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미 의회는 오바마 행정부가 요청한 국제통화기금(IMF) 쿼터 조정 개혁안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이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이면서 IMF 지분율이 4%에 불과한 중국과 여타 신흥 경제 국가들을 실망시켰다. 새로운 국제 금융 질서에 대한 요구와 명분을 높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은 기존 브레턴우즈 금융 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비관적으로 보고 ‘양다리 헤징(hedging) 전략’을 구사해 왔다.

 기존 국제기구의 개혁을 요구하며 G7 선진 국가들과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되, 동시에 새로운 지역금융기구를 실험해 왔다. 중국은 동아시아 주변국들과 함께 치앙마이이니셔티브(CMIM), 아시아채권기금 등 지역 차원의 금융 협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와 중동, 남미 지역에까지 중국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주의 협력체를 신설했다. 특히 2006년 중국·아프리카협력포럼 정상회의 이후 중국은 ‘개발금융’의 전략적 가치를 확인했고, 더욱 과감한 다자주의 경제외교를 모색해 왔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신개발은행(NDB)’과 아시아 지역 개발에 초점을 둔 AIIB의 출범을 천천히 준비했다.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글로벌 차원의 개혁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국제금융기구들을 활용하면서 기존 G7 중심의 국제기구들(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IMF)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전략이다.

 워싱턴 정치의 난맥상이 미국의 리더십을 계속 제약한다면 중국은 국제 무대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미 행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마저 의회의 반대로 무산된다면 미국의 세계 무역 전략과 아시아 회귀 전략에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최근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은 TPP가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항공모함과 맞먹는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고 역설했다. TPP가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중국이 꿈꾸는 ‘신 실크로드 전략(一帶一路)’이 꽃피울 공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 중심의 국제 경제 질서에 정면 도전할 힘은 아직 없다. 중국 지도부는 현재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경제·사회·환경 문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 중국은 외형상 G2 반열에 올랐지만 안으로는 고속 성장의 후유증을 치유하며 ‘중진국의 덫’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 혼자 힘으로 국제 규범과 비전을 제시할 만한 소프트파워도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칠 현실은 구질서와 신질서가 병존·경쟁·보완하는 다원화된 글로벌 시스템이다. 이것은 많은 국가, 특히 미국의 동맹국들이 직면한 공통된 도전이다. 미·중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분권화된 국제 질서는 중첩된 국제기구들의 기능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특정 국가의 이익이나 한쪽으로 편드는 것은 위험하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나라의 외교정책 조율을 혁신해야 한다. 강대국들뿐 아니라 주요 신흥 국가들의 내부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역전문가들과 여러 국제기구의 운영 메커니즘을 경험한 정책전문가들이 함께 드림팀을 만들어야 한다. 진영 논리를 벗어나 우수한 인재를 널리 포용하고 키워야 한다. 확장된 집단지성만이 다원화된 국제 질서의 그물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혁신은 도량과 안목을 갖춘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내부 정치의 양극화로 세계사적 흐름을 선도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합의의 내치(內治)가 21세기형 외치(外治)의 근본이자 시작이다.

손인주 홍콩대 국제정치학 교수·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칩 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