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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절반의 성공 거둔 한·미 원자력협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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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경민
한양대 교수·정치외교학

한·미 원자력협정이 타결됐다. 협상을 2년 연장하며 어렵게 타결한 결과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내용을 챙겨야 할 것인가.

 핵심적 내용은 다섯 가지다. 첫째는 협정 유효 기간이 이전(1973~2016년)의 42년에서 향후 20년으로 단축된 것이다. 세계에서 한국만큼 원자력 산업의 환경이 급속히 발전한 나라는 없다. 이젠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협정 기간이 길면 급변하는 원자력 환경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둘째는 안정적인 우라늄 공급의 길을 확보한 것이다. 전력을 생산하는 상용원자로의 연료로 쓰이는 저농축 우라늄의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경우 미국이 돕겠다는 보증을 한 셈이다. 또한 한국이 미국산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저농축하고자 할 때 고위급위원회를 통해 양국의 합의 아래 일정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진행할 수 있는 추진 경로도 마련됐다. 한국이 당장 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하지 않지만 장래에 필요하면 저농축 우라늄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다.

 그 다음에 눈여겨볼 대목은 사용 후 핵연료를 재활용하고 폐기물의 부피를 줄일 수 있는 파이로 프로세싱(Pyro-processing)의 한·미 간 공동연구를 계속 진행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2016년이면 원자로시설 내에 임시 보관하고 있는 사용 후 핵연료의 저장 용량이 한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 양을 수십 분의 일로 줄여야 하는데 파이로 프로세싱 기술이 완성되면 가능할 것으로 과학계는 내다보고 있다.

 사용 후 핵연료에서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직접 뽑지 않고 혼합물질로 추출하는 게 파이로 프로세싱 연구의 목표다. 개발에 성공하면 폐기물 양을 감축하면서 독성도 줄이고, 나중에 고속로가 개발되면 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다. 미국 일각에서 비록 혼합물질로 추출한다고 해도 미래에 또 다른 기술이 발전되면 혼합물에서 플루토늄만을 따로 추출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반대가 없지 않았다. 이로 인한 진통으로 협상이 2년을 더 끌었으며, 결국 미국은 한국과 파이로 프로세싱 연구를 계속 수행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번 협정 타결이 가능했던 배경은 한국이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 장래에 파이로 프로세싱의 실증시설을 건설할 때 약 2조원이 드는데, 한국이 그 절반을 부담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 미국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국도 폐기물 양이 많아 부피를 줄여야 하는 처지인데 한국은 기술력도 있고 인재도 있고 돈도 낼 수 있는 나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된 것이다. 한국이 그만큼 국력이 커졌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지 못살던 시절이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넷째는 한국의 원자력 수출이 보다 자유롭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미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수출한 나라다. 이전의 협정에 의하면 미국산 원전 부품이 들어갈 경우 건별로 동의를 받아야 했는데, 이번에 일괄 동의 방식으로 처리해 수출 절차가 크게 간소화됐고 시간도 단축하게 됐다. 최근 러시아 로켓으로 발사한 아리랑 인공위성 3A호에도 미국산 부품이 들어가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 로켓을 빌려 발사하면 돈도 적게 들지만 미국이 원치 않기 때문에 러시아 로켓을 빌려 우리의 위성을 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처럼 원자력이나 우주 분야는 군사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민감한 규제로 얽혀 있는 게 국제 정치의 현실이다. 한국의 원자력 플랜트 해외 수출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동의한 배경에는 미국의 경제적 실익도 적지 않다. 미국은 79년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사고 이후 지금까지 단 1기의 상용 원자로를 건설하지 않은 나라다. 이 때문에 사실은 원자력 산업 전반이 정체돼 있는 국가다. 한국의 역동적 원자력 산업 인력과 기술력은 미국으로서도 매력적인 원자력 산업 파트너인 셈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국력과 역량이 커져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비감한 국제 정치의 현실이 또 한 번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다섯째는 상설 고위급위원회를 신설한 점이다. 한국의 외교부 차관과 미국의 에너지부 부장관이 공동의장이 되어 매년 정례회의를 통해 사용 후 핵연료의 관리, 원전연료의 안정적 공급 등 원자력 협력의 이행 과정을 점검하고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미국 측 협상 파트너였던 아인혼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파이로 프로세싱 공동연구에 유보적이었다. 파이로 프로세싱 공동연구가 플루토늄을 직접 추출하지 않고 혼합물로 추출하니 핵무기 비확산에 가장 알맞다는 우리 측 주장에 대해 그는 “미국의 매파 격인 핵 과학자들은 혼합물질도 분리해 플루토늄을 몰래 추출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며 선을 그었다. 따라서 이번 협정 타결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부에서 언제든지 딴소리가 나올 수 있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또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미국이 엉뚱하게 딴지를 걸지 않도록 우리 정부도 협정 이행 사항을 철저히 점검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김경민 한양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