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8)한일회담, 김동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장관은 그의 장관 취임 직전과 직후에 나와 만나 『한일회담의타결을 위해 김사장을 주일대사로 기용할 생각이니 말아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해 왔다.
이장관은 『김사장은 자유당시절 10여년간 한일회담에 관계했고,또박력도 있고 하니 우리 들이 힘을합쳐 밀고나가면 한일회담은 기필코 성공할 것으로 확신한다』 고말했다.
나는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그 일도 별 불만이 없었으나 역시 놀던물에서 노는 것이 낫다는 속언처럼 외교관으로 복귀하는데 주저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 응낙했다.
내가 앞서 정식으로 요청을 받았다고 짐짓 서술한데는 이장관과의 사이에 이 문제를 두고 몇개월전 우연한 기회에 농담으로 주고받은 「묵계」 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연이랄수도.있는 사연은 이렇다. 뉴욕 만국박람회 참석후 서베를린에서 열린 공예품전시회를돌아보고 귀국중 태국의 방콕에 들른 것이 4월이었다.
주태대사였던 이장관과 나는 만찬석상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당시 격렬한 반대운동에 봉착하고 있던 한일회담문제를 화제로 삼으며 서로 걱정했다.
우리는 국내의경제개발계획과관련해 엄청나게 소요될 자본의 수요를 일부나마 보충하는 방안으로서도 한일회담은 더이상 질질 끌고 갈수없으며, 더군다나 주변정세의 악화 양상에 대처하는 길은 한·미·일의 공고한 관계 수립이 긴요하고,일본의 급격한 경제성장 추세에대응해 우리의 국력을 신장키위해서는 청구권을 받아 우리의경제성장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것이 급선무라는 등의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에관해 서로의 견해가 일치되어서였을까. 이대사는 느닷없이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한일회담을 타결키 위해서는,예를들면 김사장같은 분이 외무장관을 해야되지 않겠느냐』 고 하는 것이었다.
이대사는 그러면서 『김사장은 외무차관을 지낸 실력파 외교관 출신이고,또 공화당에 몸을 담고있으니만큼 앞으로 외무장관은 김사장이 될것』 이라고 단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씀을 하느냐.나는 현재의 무역진흥공사사장 자리를 충분히 즐기는 상태』라고 말하고 『이대사가 박대통령비서실장(군정때)도 지낸 박대통령의 신임받는 측근이고 배짱도 있고 학식도 풍부하므로 외무장관의 적임자이니 외무장관이 되어 한일회담을 성사시키라』 고 응수했다.
나는 『이대사가 혹시 장관이 되어 나에게 주일대사를 맡긴다면 한일회담을 책임질 용의는 있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던 것이다.
그말에 이대사는 『제가 외무장관이 될리야 만무하겠지만 된다면 김사장을 주일대사로 내보내겠다』 고 객기를 섞어 받아넘기는것이었다.
서로 첫 대면에서 이 정도의 농을 할수 있었던 것도 술잔이 오가면서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지정을 토로했고,그래서 의기가 투합했던게아닐까 생각되지만 그것이 수개월후 현실화될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박대통령은 이장관의 강력한 추천과 이병철삼성회장·송인상전재무장관등으로부터 내가 주일대사의 적임자라는 얘기를 듣고도 상당히 주저했던 것으로 나는 후일 들었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밀어준 분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