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에너지로 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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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러시아가 '탈(脫)러 친(親)서방'노선을 걷고 있는 옛 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보복 방법은 러시아가 지금까지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해 온 가스값의 파격적인 인상이다.

러시아는 기존의'사회주의 형제국'에 시장가의 20~30% 선에 불과한 특혜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해 왔다.

대표적인 손보기 대상은 지난해 '오렌지 혁명'이후 가장 노골적인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다. 러시아는 이번 주 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가격 협상에서 1000㎥당 50달러이던 기존 공급가를 내년부터 160달러로 올려 받겠다고 선언했다. 80~100달러 선으로 점진적으로 인상하겠다는 우크라이나 측의 제안을 "말도 안 된다"며 일축했다.

러시아의 가스 수출을 전담하는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 회장 알렉세이 밀레르는 13일 "내년 1월 1일까지 인상된 가격에 기초한 공급계약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가스프롬 이사회 부의장 알렉산드르 메드베제프는 14일 아예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 수출가를 최근 국제시세인 220~230달러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많이 받으니까 서방 국가 수준으로 가스를 사갈 능력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반발도 만만찮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유럽으로 수출하는 가스관과 러시아 해군의 흑해함대 기지를 붙잡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가스 공급가를 인상할 경우 러시아 가스관의 통과료를 올리겠다. 최악의 경우 가스관을 막거나 우리 맘대로 필요한 가스를 빼내 사용하겠다"고 맞섰다.

우크라이나는 또 "우리가 시세대로 가스값을 내야 한다면 흑해함대의 주둔비용도 시세로 따져 받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 해군의 주력기지인 흑해함대는 매년 1억 달러를 내고 2017년까지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항구에 주둔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흑해함대의 조기 철수를 요구해 왔다. 러시아는 "요충지를 포기할 수 없다"며 버텨 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협박은 한계가 있다. 가스관을 막을 경우 유럽이 뒤집힌다. 러시아 가스프롬은 유럽 전체 가스 사용량의 25%를 공급하고 있다. 유럽연합(EU)가입을 희망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러시아의 응징 대상에는 우크라이나에 앞서 '장미 혁명'을 이룬 그루지야, 일찌감치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합류한 발트3국, 최근 친서방 노선을 강화한 몰도바 등도 포함된다. 빅토르 흐리스텐코 러시아 산업에너지부 장관은 14일 의회 연설에서 가스 공급가 조정대상으로 이들 국가를 일일이 거명했다. 반면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벨로루시에 대해서는 내년에도 기존의 호혜적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모스크바=유철종,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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