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3)|제80화 한일회담(212)-태평외상과 두 번째 대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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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으로 향한 바로 그날, 미국에서는 이른바「쿠바사태」가 터졌다.
쿠바를 핵미사일 기지화하려는 소련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케네디」대통령은 해상봉쇄라는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군함이 쿠바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해군함정이 출동하는 등 전쟁 일보전까지 치달았던 쿠바사태는 소련이 결국 미국의 「힘의 시위」에 굴복하고 뱃머리를 돌림으로써 파국을 면했지만 이 긴장된 와중에서 당초 예정됐던 김부장과 「케네디」대통령간의 면담은 취소될수 밖에 없었다.
대신 김부장은「케네디」대통령의 동생이었던「로버트·케네디」법무장관과「러스크」국무장관을 만나 상호 관심사를 협의했다. 주의제는 혁명정부의 민정이양 계획이었지만 진행중인 한일문제에 대해서도 깊숙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김부장이 워싱턴 일정을 마치고 섄프란시스코를 돌고 있을 무렵 본국에서 박의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일본에 다시 들러 청구권문제률 마저 매듭지으라』는 지시였다.
김부장은 11월10일 다시 도오꾜에 내렸다. 이튿날 하루를 우리대표부 및 재일민단 교포들과 보낸 김부장은 12일 하오「오오히라」외상 집무실에서 두번째 대좌를 가졌다. 밖에는 1백여명의 보도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께다」수상은 때마침 유럽 방문중이었다.
몇마디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두 사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스타트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오히라」외상=수상께서 유럽으로 떠나면서『이번 기회에 가급적 현안을 매듭지어보라』는 얘기를 내게 주고 갔습니다. 우리쪽은 지금 청구권조로 8천만달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상이 떠나면서 나한테 위임해준 한도이기도 합니다. 『그런 범위라면 타결에 응해도 좋다』는게 수상 생각입니다.
▲김부장=그런 식으로 얘기가 전개돼서는 곤란합니다. 좀더 현실적으로 얘기합시다. 우리 박의장께서도 지적했지만 타결을 위해서는 양쪽 다 욕먹을 각오를 해야합니다.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려면야 우리가 구태여 여기서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오히라」외상=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일본은 아직 가난합니다. 전후복구도 다 안돼 있는 상태입니다. 대장성은 8천만달러도 많다고 불만입니다.
▲김부장=일본의 전사를 보니까 일노전쟁의 평화협상에 나갔던 대표들이 국민들로부터 배척받고 심지어 집을 불태우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디 민족 반역자였습니까. 그들의 애국심은 오히려 지금 높이 추앙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국내에서도 지금 말이 많지만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하고 여기에 나온 겁니다.
「오오히라」외상은 원래 과묵하고 신중하기로 일본 정계에서도 호가 난 사람이었다. 이날도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어눌하게 한마디를 하고 나서는 10분이고 15분이고 눈을 감은채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김부장은 참을성 있게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2시간이 넘도록 회담은 좀처럼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김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설 결심을 했다.『나는 우리가 적어도 일노전쟁의 협상대표와 같은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왔소 한데 외상께서 끝내 융통성을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어느 누가 와도 얘기는 안될 것이오.』김부장은 이 말 한마디를 더 보태고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계속><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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