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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오주한, 태극기 달고 뛰고 싶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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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케냐 출신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 에루페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뛰는 게 꿈이다. 그러나 그의 귀화 문제를 놓고 육상계에선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에루페가 걸림돌을 극복하고 내년 리우 올림픽 마라톤에 한국을 대표해 출전할 수 있을까. [중앙포토]

케냐 북부의 메마른 사막 지역, 투르카나에 한 청년이 있었다. 20세까지 홀어머니 아래서 소와 양을 키우던 이 청년은 맨땅에서 맨발로 달리는 걸 좋아했다. 그가 마라토너의 꿈을 품고 2011년 10월 한국을 찾았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한국을 위해 달리는 마라토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향에서 약 1만㎞ 떨어진 나라를 위해 뛰겠다는 남자,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27·Wilson Loyanae Erupe)다.

 그런데 에루페가 한국인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의 귀화 문제를 두고 육상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10년 넘게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마라톤에 전환점을 가져다 줄 거라는 긍정론과 단기 성과만을 위해 외국 선수를 수입하는 건 곤란하다는 비판론이 맞서고 있다.

 에루페가 마라톤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건 2012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 때였다. 2011년 5월 마라톤 공식 대회를 처음 뛴 그는 이 대회에서 2시간5분37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에루페의 세 번째 풀코스 도전이었다. 그런데 이 기록은 한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나온 최고 기록이었고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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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루페는 2013년 1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도핑 테스트에 걸려 2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말라리아 예방 주사를 맞았다가 수시 도핑 테스트에서 문제가 됐다. 징계가 풀리지마자 에루페는 지난달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6분11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2010년 케냐 엘도레트에서 육상 캠프를 운영하면서 에루페를 발굴한 오창석(53) 백석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다. 해발 2000m 고지대에서 20㎞에 이르는 오르막 흙길을 1시간 30분동안 군말 없이 달린다. 한국인 못지 않은 성실함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키 1m80cm, 몸무게 65kg의 에루페가 마라톤에 입문한 건 5년 전인 2010년이었다. 20세까지 운동 경력도 전무했다. 그러나 에루페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케냐 코치가 육상을 권유했다. 그리고 에루페는 2010년부터 오 교수가 있는 캠프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에루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봤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뛸 때마다 그는 최고였다. 그는 한국에서 뛴 4차례 레이스에서 모두 1등을 했다. 오 교수는 “에루페가 한국이 자신의 꿈을 이뤄준 곳이라고 여긴다. 케냐 일반 교사가 받는 연봉의 10배가 넘는 돈을 줄 테니 자신과 계약하자는 에이전트의 제안도 거절했다. 그 정도로 한국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에루페는 다음달 초부터 한국인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그는 지난 7일 충남체육회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다음달 초 한국에 들어오는 에루페는 충남 청양에서 훈련을 할 계획이다. 육상연맹은 지난달 회의를 열어 에루페의 귀화를 적극 돕기로 했다. 오 교수는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과 스승인 내 성을 따서 ‘오주한(走·달릴 주+韓·한국 한)’이라는 한국 이름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귀화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마라토너로서 더 많은 경험도 쌓을 계획이다. 에루페는 “ 베를린, 런던 마라톤 등 세계적인 대회에서 경험을 쌓고, 태극마크를 달고서 2020년 도쿄올림픽 금메달과 세계 최고 기록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루페의 귀화에 일부에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국 마라톤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고(故) 손기정 선생을 시작으로 서윤복(92·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황영조(45·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이봉주(45·2001년 보스턴마라톤 우승)까지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했다. 마라톤은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이는 민족 스포츠로 인식돼 왔다.

 그래서 일부에선 한국 체류 기간이 4개월 밖에 안 되는 선수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뛰기엔 부족함이 많을 거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대한체육회 규정에 따르면 그는 내년 리우 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갈 수 없다. 2013년 도핑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체육회의 ‘징계 해지 후 3년이 지나야 대표 선수로 뛸 수 있다’는 규정에 걸린다.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각종 국내 대회를 휩쓴다면 과연 국내에서 누가 마라톤을 하려고 하겠는가. 한국 마라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에루페의 귀화가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마라톤에 활력을 불어넣을 거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한국 마라톤은 2000년 2월 도쿄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의 최고 기록이 15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그동안 세계최고기록은 2시간2분57초까지 빨라졌다. 1993년 보스턴마라톤 2위에 올랐던 김재룡(49) 한국전력 코치는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 육상에선 중동 국가들이 귀화 선수를 앞세워 47개 금메달 중 15개를 땄다. 우리도 귀화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한 기자 hanskim@joongang.co.kr

마라토너 에루페 귀화 찬반 논란
고향서 소 키우다 22세 뒤늦게 입문
한국대회 신기록 세우며 4번 우승
"2020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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