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9)첫 정치회담 결렬-제80화 한일회담(20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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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일회담 타결을 위한 양국 외무장관간의 정치회담 개최가 당시로서는 눈이 번쩍 띄는 진전이었다.
우선 「정치적 타결」이라는 용어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여온 일본의 일부 여론에도 불구하고 회담의 명칭부터 「한일정처절충」으로 발표된 것이 특기할만했다.
한일회담 타결을 위한 최초의 공식정치협상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태산명동서 일필로 끝났다. 오히려 최덕신-「고사까」회담이후 협상은 수개윌동안 휴지기를 맞게된다.
일본은 박-「이께다」회담 정신에 이끌려 정치협상에 응하기는 했으나 한국의 혁명정부에 비해 타결을 몰아 불일 만한 힘이 없었다. 「이께다」수상은 자민당과 내각내부의 이견을 조정하고 사회당등 좌익세력의 반대를 뿌리치기 위해서 좀더 시간을 벌어야될 형편이었다.
다만 비록 공개는 안됐지만 최-「고사까」회담은 청구권규모에 관한 양쪽의 카드가 최초로 제시된 회담이었다. 일본신문들은 한국의 청구권규모를 10억달러부터 3억달러까지 각양각색으로 보도했다. 또 일본측 규모에 대해서도 △일반청구권 8천만달러 △무상원조 5천만달러 △차관 2억달러라고 보도했다. 밑도 끝도 없이 『청구권조로 5천만달러부터 1억달러를 고려하고있다』는 일본정부소식통의 애드벌룬을 일방적으로 흘리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한 셈이었다.
회담은 첫날부터 「고사까」외상의 엉뚱한 발언 때문에 암영이 드리웠다.
「고사까」외상은 『한국의 청구권은 38도선 이남으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이는 우리측 입장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중대문제였다. 확대해석하면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나 다를바 없었다.
일본은 또 독도문제를 들먹이는가 하면 서울에 일본대표부를 설치하자고 새삼 제의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이 모두가 회담을 타결로 이끌어갈 태세가 돼있지 않은 일본이 종래의 상투수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비쳤다. 결국 5차례, 1주일에 걸친 최초의 정처협상은 결렬로 끝나고 말았다.
폐막후 발표된 공동성명은 굳이 「결렬」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 어느 한군데 진전된 곳이나 합의사항을 담고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2차 정치회담을 될 수 있는대로 조속한 시일내에 재개한다』고 했지만 이 합의조차 바로 다음날 「고사까」외상에 의해 『주한대표부설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한 서울회담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말로 번복되었다.
돌이켜보면 청구권규모와 관련해 한일간의 첫 공식정치회담으로 간주된 최-「고사까」회담은 그후의 김-「오오히라」회담을 낳기 위한 서막이었다.
양국정부의 고위각료가 처음으로 청구권규모에 대해 서로의 보따리를 끌러 보이긴 했지만 두사람 모두 무대의 주역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전적인 재량권을 위임받지 못해 보따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
최덕신씨는 혁명정부의 주체세력이 아닌 객원에 불과했고 「고사까」씨는 『일본측 규모를 제시하기만 한다』는 일본내각의 결정에 그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최-「고사까」회당은 그런점에서 박-「이께다」회담으로 마련된 「정치적 타결」의 테이블에서 가진 한차례의 「오픈 게임」이었다.
청구권규모를 둘러싼 흥정과 절충. 그 본격적인 드라머는 그로부터 7개월 후인 62년10윌 김-「오오히라」회담에서 펼쳐지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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