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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키신저 닮아가는 오바마 외교

중앙일보

입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92)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을 닮아가고 있다. 오바마는 최근 이데올로기나 도덕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익 또는 세력 균형 관점에서 외교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많은 외교 전문가들은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1기때와 달리 성숙한 대외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평가한다.

오바마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은 이달 초 타결된 이란과의 핵 협상과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추진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오바마는 이란과의 핵 협상에서 이란의 핵 개발 능력을 중단시키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란이 해외에서 테러 세력을 지원하고 국내에서는 반대파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란에 대해 예멘의 시아파 반군 후티족 지원을 중단하라거나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라는 조건을 내걸지 않았다. 미국이 이를 고집할 경우 핵 협상이 성사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이란과의 핵 협상과 동시에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도 펼쳤다. 이달 초 미국은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의 후티 반군을 공습하고 사우디 주도의 아랍 연합군 창설을 지원했다. 또 수니파인 이집트 군부 정권에 13억 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의 군사 지원을 재개했다. 오바마는 다음달 13~14일 사우디 등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정상들을 백악관과 대통령 별장 캠프데이비드에 초청해 이란의 영향력 견제 등 안보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합의도 오바마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을 반영한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정권 등장 이듬해인 1960년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고 각종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쿠바 정권이 형 피델에서 동생 라울로 이어지고 인권 탄압이 여전함에도 오바마가 관계 개선에 나선 건 제재가 큰 효과를 보지 못한데다 국교 단절이 중남미에서 미국의 위상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2008년 미 대선 캠페인에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취임 뒤 이집트 카이로로 날아가 미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화해를 주창했지만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아 ‘이상주의적 발언’이라고 비판받았다. 또 1기 때 북한 비핵화 등 ‘핵 없는 세계’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에드워드 루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는 20일자 칼럼에서 “오바마가 대통령 연륜이 더해지며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노선 색채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외교의 제왕’ 키신저는 71년 미 탁구선수단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는 핑퐁 외교를 통해 미·중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키신저는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주석의 인권 탄압이나 제3세계 공산화 추진에 대해 침묵해 미국 진보·보수 세력으로부터 “비도덕적이다” “중국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키신저의 미·중 관계 정상화는 중국을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해 서방의 냉전 승리를 이끈 분수령이 됐다. 72년 적대국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을 체결해 미·소 긴장 완화(데탕트)를 이끌기도 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지난 2월 미 국제관계 전문가 설문 조사를 통해 지난 50년간 미국 최고의 국무장관으로 키신저를 꼽았다.

정재홍 기자 hong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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