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락산업과 소비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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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퇴근길(천호동 쪽), 길가에 늘어선 여관이 몇 개나되는지를 세어봤다. 청계천고가도로가 끝나고 장안평에 들어서면서부터 정신없이 고개를 양옆으로 돌려가며 셌다. 천호대교를 건너기전까지 40개, 다시 암사동 길로 접어들면서 20여 개 등 모두 60개가 넘었다. 천호동 한복판에 빽빽하게 들어선 「여관 숲」은 가위에 눌려 아예 세길 포기했다.
××여관, ○○장, △△안마시술소, □□사우나…. 여기에다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카바레·나이트클럽 등의 현란한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조화(?)를 이룬다.
건물 모양새나 간판의 페인트 색깔로 봐서 대부분이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다.
말이 여관이나 장이지 옛날로 치면 죄다 「반도호텔」급이다.
이미 환락가로 전락해 버린 영동 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변두리 주택가이던 이곳이 대체 어인 일로 이처럼 여관단지가 되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성업이란다. 지금도 곳곳에서 여관용 신축빌딩이 서둘러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해서 82, 83년 사이에 서울지역만 따져서 여관이 3백32개, 안마시술소가 1백 개, 사우나탕이 81개나 늘어난 것이다.
지내놓고 봐도 이들 향락산업은 지난 4년여의 불황 탈출작전에 단연 선두주자였다. 부동산경기를 단숨에 살려놓았고 「불안한 부자」들에게는 안성마춤의 안식처를 제공했다.
골치 아픈 사업을 벌이느니 있는 땅에 여관 짓고 편안하게 앉아서 버는 쪽을 택했다. 경기회복에 급급한 정부로서도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부동산경기로라도 좀 부추겨 줬으면 하는 것이 정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과연 지금의 경기는 성공적으로 불황을 극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결과 변두리 주택가가 온통 여관단지로 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한 일이다.
불황탈출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부 스스로 소비풍조의 만연을, 그것도 상식이하의 극단적인 불건전소비풍토를 조성해놓았으니 말이다. 이런 가운데도 정부는 저축을 늘려 내 후년부터는 더 이상 외채를 빌어 쓰지 않겠다는 장담이다. 이처럼 만연되는 소비풍토를 어떻게 다잡아나가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제시도 없이 그저 수수방관하면서도 말이다. 다시 물가는 꿈틀대고있고 선거가 다가서고 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이 같은 소비풍조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정말 소비는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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