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0)제80화 한국회담-김동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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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제 민주당 정부의 한일관계 얘기를 끝맺기 앞서 자유당에서부터 민주당까지에 이르는 10년 교섭사를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민주당 정부의 8개월 남짓한 집권기간 중 한일교섭은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우선 민주당정부는 자유당과는 대일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장면정부는 한반도평화를 위해 무엇보다 한일국교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남북한이 대치하는 마당에 일본을 계속 적대관계에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는게 민주당정부의 기본인식이었다. 더구나 민주당 정부는 어려운 우리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길은 일본과 손을 잡아 그들로부터 경제협력을 받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민주당정부가 비록 궤도에 진입시키지는 못했을 망정 5차5개년 계획을 입안한 것은 한일국교정상화로 청구권문제가 타결되면 이를 경제건설을 위한 외자로 쓴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보면에서 혹은 경제면에서 일본과 우방관계를 새로 설정해야하겠다는 민주당 정부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시대적 요청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박사의 대일정책은 이와는 판이했다. 우선 이박사가 대일교섭에 나선 직접적 동기는 제1의 우방인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의 방위보장을 받기 위해「맥아더」의 권유에 따라 대일교섭에 나섰던 자유당 정부는 휴전성립 이후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없는 방위선으로 설정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안전보장을 약속함에 따라 당초부터 내키지 않았던 일에 적극성을 띨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미국의 대한원조가 매년2억∼3억달러에 이르러서는 구태여 일본으로부터의 자본도입이나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따라서 자유당 정부의 대일자세는 이같은 상당한 현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완고한 논리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대통령은 대일교섭에 있어 △36년간에 걸친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청구권 △평화선의 기정사실화를 전제로 했고, 여기에다 국교정상화는 이들 문제와는 별개로 다룬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문제는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를 일단 매듭짓고 나서 별도로 검토하겠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일본의 팽창주의·군국주의에 대한 이박사의 경계심도 크게 작용했다. 한일회담 자체를 안하겠다는 생각이라기 보다 그만큼 대일 경계 의식이 철저한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에 반해 민주당 정부는 대일 경계의식이 자유당 정부보다 상대적으로 엷은 대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교정상화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정부 아래서의 한일회담이 구체적인 결론 없이 끝내 좌초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민주당 정부의 수명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도 한일간의 국교정상화가 보다 일찍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만은 생각지 않는다.
외교란 무릇 국제환경의 조성이나 정부 당사자간의 성취의지 외에도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정부의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데모로 날을 지새운 민주당정부는 한일교섭을 타결로 이끌어갈 힘이 부쳤던 것이다. 「고사까」 외상의 방한때 데모군중이 숙소인 반도호텔까지 밀려들고 일장기가 끌어내려져 불태워지는 것을 보면서 일본정부는 내심 슬금술금 뒷걸음을 쳤던 것이다. 그런 실례는 민주당 정부보다 더 강한 의지로 임했던 5·l6군사정부의 대일교섭이 6·3사태까지 이르는 거센 국론의 분열 앞에서 결국 4년이라는 기간을 더 보내야했던 데에서 입증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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