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경제] 기술 개발이 중요하지, 왜 '표준'을 따지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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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처음 발명했을 땐 전구 구멍의 크기가 다 달랐답니다. 이게 불편하다는 걸 나중에 깨닫고 세계 각국이 구멍의 크기를 똑같이 맞췄죠. 이런 걸 표준이라고 해요. 요즘은 전구의 모양이 달라도 꽂는 소켓의 크기는 어느 회사 제품이나 같답니다.

표준을 만들면 생활만 편해지는 게 아니에요. 중국의 진시황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이지요. 그러나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이룬 기간은 고작 12년밖에 안 돼요. 그런데도 왜 중국 사람들은 진시황을 통일국가의 시조로 떠받들까요?

그건 진시황이 한자와 도량형을 통일했기 때문이에요. 중국은 당시 7개 나라로 나눠져 있었어요. 7개국이 비슷한 한자를 썼지만 모양이 많이 달랐죠. 말을 서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진시황이 한자를 통일한 덕분에 하나의 나라로 통치가 가능해졌어요. 진시황은 무게.길이.넓이 같은 도량형도 표준화 했지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진시황을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은 조상으로 꼽아요.

재미있는 예를 하나만 더 들까요?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주장한 북군의 승리로 끝났죠. 당시 북군 진영은 공업이 발달했고, 남군 진영은 농업이 기반이었기 때문에 북군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북군이 이길 수 있었던 데는 숨겨진 비결이 하나 더 있었어요.

바로 소총이에요. 당시 소총은 한 자루씩 사람이 손으로 만들었어요. 이러니 소총마다 규격이 다 달랐죠. 이 때문에 부품 가운데 하나만 고장 나도 그 소총은 쓸모가 없어졌어요. 그러나 북군 쪽에선 엘리 휘트니라는 사람이 일찌감치 소총의 부품을 표준화 했지요. 그래서 소총의 핵심 부품인 노리쇠나 방아쇠가 고장 나도 그 부품만 갈아끼우면 다시 쓸 수 있었어요. 한 자루의 소총이 아쉬웠던 시절에 그 차이는 엄청난 화력의 격차로 나타났죠.

이처럼 표준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해요. 오늘날에 와선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답니다. 기술을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보다 국제표준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기업은 물론 국가의 흥망이 갈릴 정도이지요. 대표적인 예가 휴대전화 통신기술이에요. 이는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어요. 일본의 PDC 방식은 유럽연합(EU)이 뒤에 개발한 GSM 방식이나 미국의 CDMA 방식보다 기술이나 효율성에서 앞선 것으로 평가 받았지요.

그러나 일본이 국제표준에 무관심할 때 EU가 GSM 방식을 발 빠르게 국제표준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이 때문에 PDC 방식 휴대전화는 일본에서만 쓰일 뿐 수출 길이 막혀버렸어요. 반면 유럽의 노키아라는 휴대전화 회사는 세계시장 점유율 35%의 세계 1위 기업이 됐지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일본도 국제표준을 만드는 데는 뒤늦게 참여해 손해를 많이 봤죠. 이후 일본은 국제표준을 만드는 기구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국제표준을 만드는 기구는 크게 국제표준화기구(ISO).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국제전기통신위원회(ITU) 등 세 곳이 있어요.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공산품 표준은 ISO가 만들고, 전기안전 등에 관한 표준은 IEC가, 휴대전화나 통신 등의 표준은 ITU가 제정해요.

국제표준을 만들기 위해 세 기구는 분야별로 '기술위원회'라는 걸 두죠. 세계 각국의 기업이나 정부는 각 위원회에 표준을 제안해요. 많은 제안 가운데 어느 걸 국제표준으로 채택하느냐는 위원회를 이끄는 '간사'나 '의장'이 누가 되느냐에 많이 좌우돼요. 이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나 기업은 기술위원회의 간사나 의장을 많이 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죠. 그러나 한국은 불행하게도 국제사회에선 표준에 관한 한 약소국이에요. 902개의 기술위원회 가운데 한국이 맡은 간사.의장 자리는 24석밖에 안 돼요. 그나마 최근에 와서 많이 노력한 결과예요.

이처럼 한국이 표준의 후진국이 된 데는 표준에 대한 정부나 국민의 이해가 떨어졌던 데도 원인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산업자원부 산하의 기술표준원에서 제정하는 'KS'와 정보통신부가 제정하는 'KICS'라는 국가표준이 있어요. 그러나 각 정부 부처조차 국가표준을 안 따르고 제각기 만들어 쓰는 정부 규격이 1만6000종이나 돼요. 우리나라 국가표준에 안 맞는 규격이 국제표준에 맞을 리 없겠죠. 심지어 국가표준을 제정하기 위해 2000년 국무총리가 관장하는 '국가표준심의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놓고도 그동안 회의를 한번도 하지 않았죠. 기업들도 표준에는 무관심했어요.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선 민간기업들이 스스로 만든 표준이 많아요. 미국의 경우 국가표준은 1만2000종도 안 되지만 민간이 만든 업계 표준은 무려 15만 종에 달해요. 민간이 만든 표준은 스스로 필요해서 만든 거니까 실생활과 훨씬 잘 맞겠죠. 그래서 민간표준을 '표준의 뿌리'라고도 해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민간표준이 1200여 종밖에 안 돼죠. 그나마 안 쓰이는 게 태반이에요.

정부도 허술한 국가표준의 심각성을 깨닫아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정부 규격을 통일하고, 복잡한 각종 강제 기술규정을 통폐합하는 일에 착수했어요. 이르면 이달 말께 정부의 청사진이 나올 예정이에요.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추게 된 기업들도 이젠 국제표준에 자신들의 기술을 반영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지요.

◆ 국가표준이란=한 나라가 국민이 편하게 하고 기술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공산품이나 서비스 등의 규격과 생산방법, 기술, 용어 등을 정해 놓은 것을 말해요. 우리나라 국가표준은 공산품의 경우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이 관리하는 KS, 정보통신 분야에선 정보통신부가 관장하는 KICS가 있어요. 선진국에선 민간이 만든 표준이 국가표준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요. 이와 달리 각 정부 부처가 필요에 의해 따로 만든 규격이나 규정은 '정부규격'이라고 해요.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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