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베이스볼클래식 기본은 '적을 알고 나를 알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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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97년 10월 12일 잠실. LG-삼성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다. 1-4로 뒤지던 삼성이 8회 초 4점을 뽑아 5-4로 역전했다. 삼성의 역전승 분위기였다. LG의 9회 말 공격. 선두 박종호가 안타를 때렸고, 유지현의 희생번트, 박준태의 볼넷이 이어져 1사 1, 2루가 됐다. 다음은 왼손 타자 서용빈. 삼성 벤치는 그때까지 던지던 박동희를 빼고, 왼손 성준을 기용했다. 왼손 타자에 왼손 투수 매치업. 서용빈은 그날 왼손 김태한.전병호에게 막혀 3타수 무안타였다. 당연히 LG벤치의 대타 기용이 예상됐다.

그런데 LG는 서용빈을 밀고 나갔다. 성준의 투구 폼에 대한 철저한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발을 들어올린 뒤 타이밍을 길게 가져가면 직구. 성준의 초구가 손끝을 떠났다. 오른발을 들어올린 시간이 약간 길게 느껴졌다. 서용빈은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를 돌렸고, 타구는 우중간을 꿰뚫었다. 2타점 역전 끝내기 2루타. 거짓말처럼 LG가 재역전승을 거뒀다. 상대를 충분히 분석한 LG의 승리였다.

그 반대의 케이스. 2001년 11월 5일 일본 삿포로. 한국-대만의 아테네 올림픽 예선전이었다. 한국 김재박 감독은 "대만 타자들이 사이드암.언더핸드에 약하다"는 주성노.천보성 분석요원의 말을 철저히 믿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한 뒤 부랴부랴 언더핸드 조웅천(SK)을 발탁하고, 심수창(한양대)을 뺐다. 한국은 9회 초까지 4-2로 앞섰다. 선발 정민태에 이어 나온 임창용이 잘 던졌다. 대만은 사이드암에 약했다. 그러나 마무리를 위해 등판한 조웅천은 9회 말 2사 후 천즈위안에게 적시타를 내줬고, 연장 10회 말 가오즈강에게 끝내기 안타까지 얻어맞아 올림픽 티켓을 놓쳤다. 대만 타자들이 같은 사이드암이라도 빠른 슬라이더를 던지는 임창용에게는 약하지만 느린 커브와 체인지업이 주무기인 조웅천에게는 강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탓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단기전에서 전력분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국가대표 사령탑 김인식 감독은 "한판 승부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노출이 안 된 선수가 한 방 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KBO는 모든 정보와 자료, 장비를 동원해 치밀한 분석을 지원해야 한다. 한국대표팀의 주요 타깃 왕쳉밍(대만 에이스)을 발가벗기기 위해 그의 경기 비디오를 갖고 있는 메이저리그 중계방송사 Xports를 활용하고, 이승엽에게는 일본 타자와 투수의 특성에 대한 특강이라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분석 전문가들을 통해 그 장단점을 꿰뚫은 뒤 경기에 임해야 한다. 국가대항전 아닌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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