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마수에 걸리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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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9일 태국방콕의 우리나라 대사관을 찾아갔다가 얻어온 한국소개 관광책자를 들쳐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40여년만에 변한 조국의 모습 못지않게 나에게 깊은 감회와 함께 시선을 끈것은 농촌풍경 사진에 나온 질그릇 물항아리였다.
물항아리―. 이 물항아리가 내발치에서 산산조각 나며 물이 엎질러 졌을때 나의 젊은 인생도 그 질그릇 깨지듯 엉뚱한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1942년 가을 제법 바깥날씨가 옷깃속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 때였다.
당시는 일본이 동남아를 집어삼키기위해 조선 곳곳에서 갖가지 수탈을 강화할 때였다.
이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내가 살던 부산근교의 동구밖 우물가 빨래터로 물항아리를 이고 빨래를 손에 싸들고 나갔다.
빨래터에는 동네 아낙네 몇명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날받아둔 순이내며 초상치른 갑훈이네를 화제에 올려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충 빨래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집으로 가기위해 차례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조금늦게 빨래터에 나갔던 나는 맨나중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돼 물을 길으려니 난데없이 일본순사 서너명이 우물쪽으로 나타났다. 정복차림에 칼을 차고 금빛나는 회중시계를 늘어뜨린 이들 일본순사 일행이 처음에는 나에게 목이 마르니 물 한바가지만 달라고 청했다. 농담을 섞어 우스개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어 크게 경계심을 갖지는 않았다.
내가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나서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우물가를 떠나려는 순간 순사한명이 느닷없이 『조오센진 아다라시 좃또맛떼』(조선처녀 좀 봅시다)라고 소리를 치더니 날 붙잡아 끌었다.
깜짝 놀라 몸을 빼는 순간 머리에 이고 있던 물항아리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물이 튀어 나의 옷을 흥건히 적셨다.
대야에 담아 두었던 빨래뭉치도 여기저기 흐트러져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나를 불잡은 일본순사를 쳐다보니 그도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조오센진 바가야로.』욕설을 퍼부으며 그 순사의 표정이 금세 험악했다.
순사정장이 물에 젖어 화가나긴 했겠지만 물동이를 인 사람을 잡아채는 것은 물을 뒤집어 쓰겠다는 속셈이 분명한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그러나 상대는 순사였다. 침략자의 위세로 조선사람을 갖가지로 압박하던 이들이 아닌가.그래서 나는 두렵고 몸이 떨려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그 순사는 막무가내로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말로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새 동행했던 다른 일본순사들도 합세해 나를 윽박지르며 설쳐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지 순사 하나가 포승을 꺼내 내 손을 낚아채 묶더니 동구밖 신작로로 나를 끌고 갔다. 나는 계속 『용서해달라』고 빌며 잡혀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순사들은 나를 묶은 포승을 놓지않고 끌고가더니 그들이 타고온 달구지에 강제로 태웠다.
이때 일본은 동남아 진출 일본행의 전투지역 위안부로 조선 여자들을 강제로 또는 속임수로 끌어 갔었다.
많은 경우 일본순사들이나 일본매춘업자들이 시골을 돌아다니며 가난한집 여자들을 상대로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잘 먹고 잘입게 해준다』고 속임수를 써 데려가 전장의 일본군법사들을 상대로 위안부를 시켰다.
나의 경우는 이처럼 속임수에 솔깃해 내발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완전히 토끼사냥하듯 한 사람사냥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나는 강제로 달구지에 끌려올려진뒤 순사들의 발에 마구차여 금방 까무러쳤다.
전신의 고통속에서도 『어서 여기를 도망가야 된다』고 생각했으나 손이 묶여 있는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젠 이름도 성도 잊어버린 두번째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어머니·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속에서도 나는 내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랐다. 「고반소」(교번소·파출소)로 가겠꺼니 생각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래야 물항아리를 떨어뜨려 순사 옷 적신 것 밖에 더 있느냐 싶어 그런대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를 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어떤 자그마한 방으로 여자들만이가득차 있었다. 이곳이 감옥이었던 것 같다.
그 뒤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몇차례 홍역을 치른 것 같다.
내가 갇혀있는 방에는 여자들 대여섯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내나이 또래로 17, 18세부터 25, 26세 가량 돼보였다.
이것이 나의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그후의 더 벅찬 고난으로 이때의 기억은 희미하다.
오로지 그때 그방의 쾨쾨한 냄새만이 나의 두려움과 함께 아직도 내 코 끝에 남아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핫차이(태국)=전종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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