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겨울을 준비하는 느긋한 생활의 지혜 아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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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겨울이 어지간히 춥더니 봄마저 추위로 진통을 겪는가보다. 이번 봄은 추웠으니 봄이 짧아지려나?
봄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기다렸는데, 봄소식이 막상 전해지니 봄에 해야할 일들이 한꺼번에 쌓여 있는 느낌이다.
두터운 겨울옷을 정리하고 마루 한쪽에 겨우내 세워뒀던 난로도 손질해야 하고, 김장 항아리도 파내고 헹궈야한다. 고추장·간장항아리도 열어봐야 하고, 가족들의 봄옷도 찾아줘야 하는데 무엇보다 큰 숙제는, 김치를 꼬박 담가야 한다는 부담이다.
기다렸던 봄이건만 쌓인 일을 생각하니 귀찮고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이번 봄에는 봄 준비를 제대로 하고 향긋한 봄 식탁을 챙겨보리라고,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동안 별러왔던 봄인데, 봄에 해야할 일이 한꺼번에 닥치니 짧은 봄이 아쉬워진다.
봄은 길어야 석달, 짧으면 한달이다. 겨울을 정리하고 봄을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짧다. 곧 목련꽃이 하늘을 한바탕 뒤덮고 나서 여름이 성큼 닥쳐올 것을 생각하면 내가 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봄에 쫓겨 밀려가는 느낌마저 든다.
1년 속의 사계절, 정말 숨가쁜 1년이다. 봄이 왔나보다 하면 여름이고, 이제 더위를 벗어나서 살만 하다고 느끼면 겨울옷을 끄집어 내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바빠진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고 봄이 가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
빨리 해내지 못하면 계절을 놓친다. 봄에 친구를 만나면 고추장·된장 이야기를 하고 서로가 재촉해준다. 초겨울, 계모임에 나가면 금년 김장은 언제까지 해치우는 것이 좋다고 서로 일러준다.
사계절이 있어서 좋다고들 한다. 산천이 아름답게 변하고 사람들이 민감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계절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다고도 한다.
그러나 사계절은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고 있다. 봄에 할 일은 봄에 해야하고 겨울이 닥치기 전에 겨울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봄에 겨울을 준비하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다가올 계절을 성급하게 기다리고 있다. 봄이 빨리 오지 않아서 성급해지고 날이 풀리지 않는다고 공연히 성화다.
그러다가 봄이 닥치면 한꺼번에 쌓아둔 일들을 해치워야 하니 마음은 바빠지고 일은 거칠어진다.
길게 멀게 보아야 한다고들 하면서도 그러질 못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가야 튼튼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고 마는 것이 사계절 탓인가.
이제 날이 풀리면 막혔던 하수도를 뚫느라고 골목을 파헤쳐야 하고 얼어붙어 갈라진 담들을 새로 쌓아야 한다. 한 평 건너 집 뜯는 소리가 들리고 골목 밖으로 시멘트 먼지가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길바닥은 흙투성이가 되고 하수도가 흙먼지로 막혀버린다.
느긋한 생활의 지혜를 이 봄과 함께 간직하고 싶다. 이 짧은 봄에 겨울동안 쌓아놓았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금년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지만, 여름이 연결된 것이 아니고 내년 봄이 연결되어 있고, 또 후년 봄도 연결되어 있다.
봄은 봄으로 연결하고 겨울은 겨울에 연결해 보자. 사계절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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