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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AIIB 총재 자리 버리면 최후의 승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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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팀 차장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1일 또 하나의 전투가 벌어졌다. 경제역사가들이 말하는 ‘브레턴우즈 전투’다. 그날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호텔엔 44개국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전후 세계 돈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쟁 와중에 700여 명이 참가했지만 무대의 주역은 두 사람이었다. 영국 대표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미국 대표이면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경제 브레인인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두 사람은 갈등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케인스는 이미 기운 ‘파운드 제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반면 화이트는 ‘달러 제국’을 공식화해야 했다. 이미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다. 영국뿐 아니라 소련도 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단 하루의 전쟁도 치르기 버거웠다. 그 시절 미국의 힘은 지금 중국 이상이었다.

 케인스에게 미국은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경제 식견을 발휘해 회의장 분위기를 장악했다. 특유의 독설로는 화이트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역사가의 눈에 케인스는 ‘몰락 가문의 귀부인’이 마지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쓰는 꼴이었다. 이런 케인스에게 화이트는 맞받아쳤다. 영국 경제 저술가인 벤 스타일은 2013년 저서인 『브레턴우즈 전투』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전투였다. 수차례 회의 자체가 무산될 지경까지 갈등이 치닫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회의 판은 깨지지 않았다. 전후 세계 돈의 세계를 규정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마련됐다. 화이트의 의도대로 달러가 태양이 됐다. 파운드·프랑 등 유럽 통화는 달러를 중심으로 도는 행성으로 격하됐다. 케인스가 국가 간 최후의 결제통화로 제안한 방코(Bancor)는 태양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화이트가 모든 전리품을 독식하진 않았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작동 원리 곳곳에 케인스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무엇보다 몰락하는 가문의 귀부인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듯 화이트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자리를 유럽에 넘겨줬다. 그래도 미 금융 패권은 이후 흔들리지 않았다.

 이후 70여 년이 흘렀다. 중국이 제안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지분과 지배 구조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요량이다. 아시아뿐 아니라 서방의 주요 국가들도 참여한다. 미국만이 참여를 망설이고 있다. 중국이 1차전을 승리한 셈이다.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올 연말 설립까지 지배 구조 등을 놓고 ‘AIIB 전투’가 벌어질 듯하다. 미국이 참여하면 패권 국가로서 축적한 노하우로 신생 강대국 중국을 쥐락펴락하려 들 것이다. 케인스가 현란한 경제 식견을 내세워 화이트를 요리했듯이 말이다. 중국은 전리품 리스트보다 양보 카드를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다. 통 크게 AIIB 총재 자리를 내놓으면 어떨까. 70여 년 전 화이트처럼 말이다.

강남규 국제경제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