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을 열며

박상옥은 장그래에게 빚졌다

중앙일보

입력 2015.04.10 00:16

업데이트 2015.04.10 00:44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덜 끝난 것 같아서요. 모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올 초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화제작 ‘미생(未生)’. 주인공 장그래의 이 대사는 명장면 중 하나다. 대형 종합상사의 비정규직 인턴 사원. 존재감 없던 막내의 말이 팀장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장면의 전후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팀장 오상식 차장과 비정규직 인턴 장그래 등으로 구성된 영업3팀은 회사의 요르단 사업 비리를 폭로했다. 당사자들은 잘리거나 좌천됐다. 매사에 진솔했지만 밀고자 처지가 되어버린 영업3팀. 동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회사 전체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든 죄책감에 휩싸인 그때, 장그래는 공중에 떠버린 문제의 사업(요르단 자동차 수출)을 다시 해보자고 제안한다. 이유를 묻는 팀장. 장그래는 답했다.

 “우리 팀 일이 덜 끝난 것 같아서요. 모욕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막내의 당돌한 결자해지(結者解之). 정규직 상사맨들도 할 말을 잃었다.

 수많은 20대들이 장그래를 응원했다.

 만화 판매량과 드라마 시청률이 인기를 입증했다. 어딘지 나와 닮은 캐릭터에 연민과 공감을 느꼈다는 게 가장 큰 흥행 이유였다. 여기에 더해진 비정규직 막내의 결기 어린 승부수는 통쾌한 보너스였다. 40대인 나도 쾌감을 느꼈으니까. 고참 선배들은 왠지 뜨끔해하면서도 “그래,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라고 시간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래, 아는 건 쥐뿔도 없지만 내 일을 가장 사랑하고 의미를 찾던 때가 바로 막내 시절 아니던가.

 잊혀져 가는 장그래가 최근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떠올랐다. ‘말석(末席)검사’라는 표현 때문이다. 회의나 회식 때 늘 끝자리(말석)에 앉아서 막내를 말석이라고 부른다. 박 후보자는 28년 전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팀 막내 검사였다. 그가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자 당시 수사에서 고문 경찰을 추가로 밝혀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축소했는지 논란이 커졌다.

 청문회의 진실 공방을 지켜보면서도 판단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명 시점부터 내내 아쉬운 부분은 박 후보자가 말석검사 뒤에 숨었다는 점이다.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선배 검사(안상수 창원시장)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수사할 수 있는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건 무리다. 그때(28년 전)는 목숨 걸고 한 거다”라고 막내를 보호했다. 다소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엄혹한 시대상을 감안하면 설득력 있는 설명인 건 맞다.

 하지만 박 후보자에게 묻고 싶다. 지금의 말석검사는 그때보다 더 결기 있게 행동하기를 바라는지. 선배나 조직의 지시보다 정의감과 수사 원칙이 먼저라고 말해 줄 수 있는지. 1987년 이후에 태어난 20대를 설득할 준비가 돼 있는지…. 말석검사 해명은 장그래에게 열광한 젊은이들에게 모욕적일 수 있다. 일단 해명을 해버렸으니 박 후보자는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