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라 힘 빠졌나 … 막판에 무너진 '빨간바지 마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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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빨간색 반바지를 입은 김세영. 9번홀까지 2타차 선두를 달리다 역전 당했다. [란초 미라지 AP=뉴시스]

파3의 14번홀.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을 노리던 김세영(22·미래에셋)에겐 통한의 홀이었다.

 2.5m거리의 파퍼트가 홀을 지나친 탓에 70cm 거리의 보기 퍼트를 남겼던 김세영은 스트로크에 앞서 멈칫했다. 퍼팅 스트로크를 앞두고 동작을 풀더니 다시 한 번 홀을 쳐다봤다. 평소와 달리 볼 앞에서 머뭇거렸던 김세영은 짧은 거리의 보기 퍼트도 놓치면서 4퍼트로 더블보기를 했다. 시즌 2승,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의 꿈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역전의 여왕’ 김세영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역전패를 당했다.

 김세영은 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 란초 미라지의 미션힐스골프장에서 열린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5개를 잡았으나 더블보기 2개와 보기 4개를 범한 끝에 3타를 잃었다. 3타차 단독선두로 최종 라운드에 들어갔던 그는 결국 합계 7언더파로 공동 4위에 그쳤다.

 이제까지 6차례 우승(한국 5승, 미국 1승)을 모두 역전승으로 장식했던 김세영은 마지막날 항상 입었던 빨간색 긴바지 대신 빨간색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긴바지가 아닌 반바지를 입고 나왔던 탓일까. 김세영이 추격자로 나설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던 빨간 바지의 마술은 앞서가는 상황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세계랭킹 3위 스테이시 루이스(30·미국)의 거센 추격을 받은 김세영은 4번홀(파4)에서 티샷 실수로 더블보기를 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친 끝에 9번홀까지는 2타 차 선두를 유지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사막의 모래 바람이 거세진 후반 9홀에서 김세영은 눈에 띄게 멈칫거렸다. 1~3라운드 54개 홀에선 보기를 6개 밖에 하지 않았지만 최종일 후반 9홀에서만 더블보기 1개와 보기 4개를 범했다. JTBC골프 임경빈 해설위원은 “긴장한 상황일수록 몸에 밴 프리샷 루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루틴이 깨지면서 샷도, 퍼트도 흐트러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골프에서 샷을 하기 전 준비 동작인 프리샷 루틴은 매우 중요하다. 프리샷 루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샷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96년 마스터스에서 6타 차 선두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했다가 닉 팔도(58·잉글랜드)에게 5타 차 역전패를 당한 그렉 노먼(60·호주)이었다. 노먼은 3라운드까지 프리샷 루틴에 이어 샷을 하기까지 26초가 걸렸으나 마지막 날엔 무려 38초의 준비 시간을 가지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이후 골프계에는 ‘노먼처럼 무너지다(Normanify)’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우승은 장타자 브리타니 린시컴(30·미국)이 차지했다. 17번홀까지 2타 차로 뒤져 우승과 거리가 멀어보였던 린시컴은 18번홀(파5) 이글로 합계 9언더파를 기록, 극적으로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갔다. 그리고는 연장 세 번째 홀에서 파세이브에 성공해 보기를 범한 루이스를 물리쳤다. 이제까지 4차례 연장전에서 모두 패했던 린시컴은 4전5기를 이루며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연속 언더파 라운드 신기록이 불발된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8·뉴질랜드)는 3라운드 연속 오버파를 쳤다. 최종일 1오버파를 기록하며 합계 3오버파 공동 51위에 그쳤다. 11개 대회 연속으로 이어졌던 톱 10 입상도 불발됐다.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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