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터뷰] 균형자론 핵심참모 이종석 NSC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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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변화된 동북아 환경에서 나아갈 방향을 짚었다는 옹호론부터 능력에 벅찬 공허한 개념으로 한.미동맹만 허물 뿐이란 비판까지 다양하다. 균형자론의 핵심에 서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종석 차장을 12일 만났다.

-지난 2월 24일 노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한 이래 논란이 계속된다. 모호하고 실체도 없다는 것이다. 말하려는 균형자론이 뭔가.

"참여정부의 모토는 '평화 번영의 동북아 시대'다. 균형자는 이 목표를 위해 제시된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전략적 비전이다. 동북아 공동체라는 집을 짓는다고 할 때 경제 전략이 동북아 허브론이라면 균형자론은 외교 전략이다. 나온 배경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실이다. 하나의 현실은 동북아가 경제.문화적으로 유기적이며 상호 의존적 관계를 깊이 맺어가고, 통합지향적 요소도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평화구조 구축에 합의하면서도 갈등을 계속 벌이는 현실이다. 균형자론은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이런 두 현실을 균형있게 접목시키겠다는 중장기적 전략이자 비전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장기간 지속돼온 갈등을 화해로, 대립을 협력으로 전환시키려면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행위자로서, 그리고 역내 국가 간에 조화를 추구하고 평화 번영을 촉진하는 주체로서 역할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동북아 균형자라는 것이다."

-균형이란 단어의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다.

"균형자는 장기적 비전, 거시적 안목 속에 나가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하나하나 사안에서는 갈등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기본 목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부분에서 균형을 취한다는 뜻인가.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균형자론이 모든 외교.안보 현상을 다 집어넣을 수 있는 시장바구니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전략적 비전이다. 동북아의 평화 구축 과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고 필요한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동북아에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지고 일정한 동북아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면 균형자 역할은 소멸하게 된다."

-평화.균형이 좋지만 위협과 강압이 존재하는 현실과 유리된 것 아닌가.

"물리적 방법말고는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 도무지 제어되지 않을 때 이를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는 분명한 확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균형자론은 예방 외교이기도 하다. 평화를 위해 갈등과 분쟁을 예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세력균형론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세력균형론은 역내 국가들의 국력이 비슷하면 균형이 유지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는 모든 게 군사력에 좌우되고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의 현상유지론이다. 우리의 균형자론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패권적 경쟁이 발생했다. 한반도 안정이 동북아 평화의 기본 전제라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질서가 짜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는 한반도에서 국가 간 갈등으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고, 발생하면 제어할 수 있는 기본적 국가역량을 갖추고 화해협력으로 가도록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 단 한번도 이 지역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지 않은 유일한 세력으로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점,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을 매개하는 반도국가라는 점도 유리한 요소다."

-이를 실천할 역량이 있나.

"우리의 경제.문화.외교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배치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균형자로서 당장 모든 것을 할 수는 없겠지만 지향점을 갖고 나간다는 것이다. 하부 구조에선 그런 유기성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동북아에서는 전쟁이 발생하면 토대가 붕괴하는 상호 의존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공허하게 들린다.

"예를 들자. 일본.중국 사이엔 오랫동안 정상외교가 안 되는 어려움이 있다. 한.중.일 3국 간에 보다 높은 차원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를 우리가 나름대로 주도할 수 있다. 우리 외교장관이나 고위 관계자가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에서 대접을 받고,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미국.중국이 한국과 협력하는 것도 우리의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의 말 한마디가 유엔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대망상은 안 되지만 국가 역량을 비하하고 왜소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균형자에 몰두하다 보면 한.미동맹에 균열이 올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한다. 미국이 신봉하는 민주주의와 가장 접근한 나라가 한국이다. 양국 사이에 소소하고 번잡한 얘기들이 오가지만 한.미 간에는 유대와 전통을 끊기 어려운 연대성이 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는 나라다. 한.미동맹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용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에서 한국의 지렛대를 더 강화할 수 있다."

-미.중 갈등이 벌어질 경우 균형자론에 따르면 중국 편을 들 수도 있다. 미국이 지지하는 이해관계를 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한.미동맹이 온전하겠는가.

"한.미동맹이 균형자론의 축이라는 설명에 대해 레토릭(修辭)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물론 미국과 중국이 커다란 갈등을 벌인다면 한국이 어떻게 막겠나. 균형 잡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구상하는 동북아 질서다. 미.중 갈등을 전제로 해 동북아를 보지 않는다. 동북아에서 통합과 연대의 질서를 만드는 것은 한.미동맹의 틀에서도 가능하다. 단기적인 미.중 갈등의 경우 사안마다 한쪽 편을 들고 한쪽은 반대하거나 하진 않는다. 동맹은 큰 흐름에서 함께하는 장기적 운명공동체다. 작은 사안에 대해서는 이치를 따진다. 동맹이라고 매사 편들고 동맹이 아니라고 반대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땐 거중조정도 하고 어떤 땐 동맹에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많은 경우 동맹과 이해를 같이한다. 한.미동맹은 우리의 국가이익, 전략적 이해와 연결돼 있다."

-그러면 미국은 균형자론에 반대하진 않았나. 주변국은 어떤가.

"중국도 지지한다는 입장이고 북한도 구체적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부정적이진 않다. 미국엔 먼저 설명을 했고 이후 물어올 때마다 설명했다. 미국에 설명한 이유는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균형자론에 걸림돌이 되고, 한.미 갈등 요인이 되지 않겠는가.

"미국의 일관된 입장은 동북아에 통합적 안정질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뜻을 전해온다. 한국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 가능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노 대통령과 중국과 함께하는 통합질서를 얘기한다. 노 대통령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왔을 때 이를 제기했고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평화적 통합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말을 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갈등 요인이 될 것이란 지적이 있다.

"이 문제는 전 세계에 걸친 미군의 신속화.경량화.기동화 재편과 관계 있다. 우린 미국에 설명했다. '전략적 유연성은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동북아엔 안보적 불안 요인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안정을 위협하거나 부담을 주는 부분은 제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 200여 개 나라 중 4~5곳을 빼곤 다 된다는 것이다."

-균형자론과 같이 중요하고 장기적인 전략 개념을 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검토와 연구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 비춰지기에는 노 대통령이 불쑥 또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던져 놓은 개념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니다. 노 대통령과 참모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동북아시아 구조, 정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미래 비전을 집중 토론했다. 이때 동북아의 안보협력 구조와 경제협력 구조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부각됐다. 대통령은 '진행되는 경제와 고착된 안보'를 맞춰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구한말 100여 년 전 한국 역사에 대한 반성을 여러 차례 얘기했다. 참모들 사이에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토론도 수차례 있었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통령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열강들의 패권 갈등이 벌어졌을 때 이를 제어하고 우리 때문에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는 국가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을 했다. 앞으로 절대로 무자비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대통령의 머릿속에 있다. 그 과정에서 '협력적 자주국방에 기초한 자위적 국방역량과 총체적 국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이걸 해낸다'는 착안을 말했다. 그것이 동북아 균형자란 표현으로 등장한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과정에서 균형자론은 어떻게 적용되나.

"균형자는 해결의 틀이 잡히지 않고 해결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적극 나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북핵문제 해법에 대한 인식은 이미 공유되고 있다. 6자회담 참여국들은 북한의 핵포기에 합의하고 있다. 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북핵문제는 균형자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다만 북핵문제 해결을 전제로 6자회담을 동북아 평화 안보 협의체로 발전시키거나, 6자회담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는 단계가 되거나 하면 그때부터는 균형자역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균형자론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보는가.

"18~19세기 세력균형론에 바탕을 둔 냉소적 비판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강대국만이 균형자일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부족한 점에 대한 비판은 받겠다. 그러나 이름을 가지고 의도가 뭐냐는 등 비판을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질적인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리=서승욱, 사진=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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