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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혼밥' 즐기다 외로울 땐 '밥먹자' 앱 꾸~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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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친구도 경쟁자다’. 친구와 만나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요즘 청춘들 사이에선 식사도 홀로 해결하는 ‘혼밥족’이 늘고 있다. 대학가엔 신촌 ‘이찌멘’, 서울대 인근 ‘싸움의 고수’, 홍익대 앞 ‘델문도’ ‘니드맘밥’ 등 1인 식당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C대 졸업생 김모(26·여)씨는 마음을 나누던 입학 동기와 소원해졌다. 지난해 대기업 계열사 같은 파트에 지원한 걸 알게 되면서다. 처음엔 ‘같이 붙자’고 다짐했지만 차츰 서먹해져 합격 여부조차 안 묻는 사이가 됐다.

 공연 관련 학과를 전공하는 정모(27·여)씨도 단짝이던 친구와 등 돌린 기억이 있다. 정씨는 “2명씩 팀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라는 교수님 얘기에 당연히 친구를 떠올렸지만, 정작 그는 학점이 높은 다른 친구와 짝을 지었다”며 “학점 앞엔 친구도 없었다. 그 뒤론 홀로 수업을 듣는 ‘독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취업 빙하 시대’. 가까운 친구조차 경쟁자일 수밖에 없는 청춘들의 현실이다. 본지 취재팀이 대학생 30여 명에게 물은 결과 대다수가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친구보다 남이 더 편하고, 때로는 혼자인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취업 무한 경쟁 시대가 낳은 20대의 새로운 자화상, ‘호모 솔리타리우스(Homo Solitarius·외로운 인간)’의 모습이다.

 친목 도모의 터전이던 동아리는 취업 전선의 전진 기지가 된 지 오래다. 일부 경영·리더십 동아리는 경쟁률이 높아서 면접 등 가입 전형이 무섭게 빡빡해졌다. 이른바 ‘동아리 고시’다. 서울 D대를 졸업한 주모(25·여)씨는 “교내 역량개발센터가 운영하는 리더십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친구를 사귈 여유는 전혀 없었다”며 “연락하고 지내는 동아리 회원은 없지만 입사 지원서에 한 줄 쓸 경험이 생긴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취업난은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을 낳았다. 신촌의 ‘이찌멘’, 서울대 인근 ‘싸움의 고수’, 홍익대 앞 ‘델문도’ ‘니드맘밥’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1인 식당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24일 이찌멘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최현정(27·여)씨는 “친구와 밥을 먹다 보면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 많아서 혼자 밥 먹는 곳을 즐긴다”며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취업 준비를 위해 시간을 아끼려면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고려대생 김모(21·여)씨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취업 준비 때문에 혼자 밥 먹을 일이 많다. 친구를 부르려 해도 다들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인간 관계를 이어준다는 SNS도 20대와 만나면 용도가 달라진다. 박웅기 숭실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대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학생의 하루 SNS 평균 사용 시간은 88분이었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국민 스마트폰 인터넷 하루 평균 이용시간 76분보다 길었다. 대학생들은 SNS 이용 동기로 ‘추억 공유’를 가장 많이 들었지만 ‘개성 표현’이라는 응답이 ‘관계 맺기’ ‘정보 공유’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박 교수는 “지금의 20대는 다른 사람과 실제로 관계를 맺기보다 자기만족을 위해 SNS를 이용한다”고 분석했다.

 다음소프트에 2010년부터 최근까지 ‘외롭다’는 키워드로 블로그 분석을 의뢰한 결과 연관어 1위는 ‘사람(언급량 7만5150)’이었다. 2위는 ‘혼자(3만7282)’였고 그 다음은 ‘친구(2만9930)’였다. 권미경 이사는 “20대가 주로 사용하는 블로그에서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친구’로 분석됐다”며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내용도 많지만, 친구가 외로움을 깊게 하는 존재라는 글도 상당수”라고 했다.

 모바일로 즐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 20대에서 큰 인기를 끄는 현상도 친구 없이 홀로 외로움을 달래는 청춘들의 단면을 보여준다. 7080세대에게 익숙한 ‘다마고치’처럼 ‘프린세스 메이커’ ‘우파루 마운틴’ 등의 게임은 공주나 캐릭터를 이용자가 성장시키는 게 주된 내용이다. 2013년 2월 출시된 우파루 마운틴은 국내 누적 다운로드 800만 건을 기록했다. 개발사인 NHN엔터테인먼트 김청 전임은 “모바일 속에서 모르는 사람과 쉽게 친구를 맺고 함께 즐길 수 있어 20대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즐긴다는 대학생 김모(23·여)씨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게임 시작버튼을 누르는 것”이라며 “가상의 친구들을 만나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했다.

도서관처럼 양 옆으로 칸막이가 세워진 서울 신촌 1인 식당 ‘이찌멘’의 25일 늦은 점심 시간 풍경 .

‘혼밥족’을 위해 모르는 사람과 식사 약속을 잡도록 돕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개발자인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4학년 이현재(22)씨는 “하루 세 끼 모두 ‘혼밥’을 하다 보니 사무치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잠시 모여 같이 밥 먹고 또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만들게 됐다”고 했다. 그가 앱 개발에 확신을 갖게 된 건 설문조사 결과 때문이다. 자체적으로 서울대생 225명을 조사해 보니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식사할 의향이 있다”는 대답이 63%였다.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과 대화에 목적을 둔 모임도 등장했다. 지난해 4월 만들어진 ‘토크 파티’는 평일 저녁 게릴라 형식으로 모르는 사람과 만나 함께 밥을 먹는 모임이다. 주로 외국인 유학생과 한국 젊은이들이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기획자인 김기림(28)씨는 “세상은 넓고 만날 사람은 정말 많다. 대학·취업이라는 좁은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친구와 스펙 쌓기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대학생들 사이에선 인간관계와 관련된 신조어도 많이 생겨났다.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준말이다. ‘금사빠’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연서복’은 연애에 서툰 복학생을 일컫는다. 대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관계 맺기를 겁내지만, 또 고립되기는 두려운 젊은이들의 고민이 담겨 있는 단어들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80년대 대학생들은 정의를 위해 함께 맞서 싸우고 막걸리로 동지의식을 다지며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면 지금은 또래 집단이라기보다 ‘경쟁자’라는 의식이 강해 친구끼리 노트 빌리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취업 때문에 친구에게 쏟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혼자 지내는 걸 편하게 여기는 학생들이 팀워크가 중요한 기업에 입사했을 경우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봉·이은·정혁준·김하온 기자 m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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