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타계…향년 91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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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시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며 “(아들) 리셴룽 총리가 매우 슬퍼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 전 총리는 지난달 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다. 그는 2008년부터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말년에는 말초신경 장애 등 여러 질병과 싸워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발표해 리 전 총리의 타계에 깊은 애도를 전하고 리 전 총리의 가족, 싱가포르 국민과 정부에 위로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리셴룽(李顯龍) 현 싱가포르 총리(3대)의 아버지인 리콴유 전 총리는 1959년~1990년까지 31년간 총리를 지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2004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와 2004년~2011년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지내며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콴유가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취임한 1959년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자치정부로 승격한 해다. 그는 싱가포르인들에게 취임 일성으로 ‘국가 생존’을 강조했다.『리콴유와의 대화』를 지은 저자 톰 플레이트는 리콴유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존’이라 평가했다. 서울보다 약간 큰 영토에 인구 530만의 싱가포르. 영국에서 갓 독립한 신생 정부의 최대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식 ‘사회 민주주의’를 내걸었다. 시장을 완전 개방해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면서 금융 분야를 키웠고 자본주의를 꽃피웠다. 그러면서도 토지 국유화를 통해 국민의 86%에게 공공 주택을 제공했다.

그는 ‘클린 앤 그린(Clean & Green)’을 강조했다. 깨끗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였다. 1994년 리콴유는 장관 등 고위 공직자의 연봉을 사기업 임원 못잖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했다. 청렴하고 뛰어난 공직자를 양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싱가포르 거리에 껌자국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클린 앤 그린’ 정책 덕이다. “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한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리콴유는 태형(볼기를 때리는 형벌)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싱가포르에선 지금도 태형이 집행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일당독재)가 공존하는 싱가포르를 ‘잘 살지만 숨막히는 감옥’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일각에선 리 전 총리를 ‘동남아시아의 독재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싱가포르의 번영에 초석을 놓은 지도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 리콴유의 강한 리더십 아래 움직인 결과, 싱가포르 경제는 번영의 길을 걸었다. 리콴유 취임 첫 해 400달러(45만 원)에 불과하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퇴임한 1990년 1만2750달러로 30배 이상 늘었다. 2014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만6113달러(세계 8위)다. 2000년 출간된 리콴유 회고록『일류국가로의 길(From the third world to first)』처럼 3류 국가에서 1류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리콴유 전 총리는 일찍이 저출산ㆍ고령화를 겨냥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1983년 결혼을 알선하는 사회개발부(Social Development Unit)를 설립해 미혼 남녀의 만남을 정부 차원에서 도왔다. 3~4명의 자녀를 출산하는 고학력 여성들에게는 세금ㆍ교육ㆍ주택을 지원하는 정책도 도입됐다. 2013년에도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에서 최대 문제는 저출산”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20~21세기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자 아시아 경제 기적을 촉발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우리의 존경을 받는 원로이며 지금도 쉼없이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의 평가처럼 리콴유 전 총리는 은퇴 후에도 왕성한 행보를 보였다. 72세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할 만큼 최신 동향에도 깨어있었다. 2013년『한 남자의 세계관』이라는 대담집을 내기도 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설립한 국제 협회에 헨리 키신저 등과 함께 등록해 회원으로 활동했다.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 피츠 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정치인이 되기 전엔 변호사로 일했다.

리 전 총리는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째 아들 리셴룽 총리는 2004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다. 리셴룽 총리의 아내이자 리콴유의 며느리인 호칭(何晶)은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의 최고 경영자를 맡고 있다. 둘째 아들 리셴양(李顯陽)은 싱가포르 최대 회사인 싱텔(싱가포르 텔레콤)의 최고 경영자다. 딸 리웨이링(李瑋玲)은 싱가포르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잘못되면 무덤에서라도 일어나겠다(1988년)”고 말했던 리콴유 전 총리는 국가에 대한 애정은 컸지만 자신이 우상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후에 자택이 ‘국가 성지’로 지정될까 염려해 자신이 죽거든 집을 허물라는 지시도 내렸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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