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저녁밥이 있는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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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34면

버스가 판교 톨게이트를 지날 때부터 남자는 자꾸 시간을 확인한다. 이미 8시 50분이 넘었다. 마음이 바쁠수록 도로는 막히고 버스는 느리게 간다. 남자는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9시. 겨우 두 정류소를 오는 데 10분이나 허비했다. 오늘도 늦은 것이 분명하다. 아침 출근이 아니다. 남자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아내는 남자를 기다린다. 아내는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한다. 다른 집은 남편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온다고 연락하면 아내들이 좋아한다는데 남자네 집은 다르다. 늦더라도 가능하면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 아내는 최소한 한끼는 같이 식사해야 식구라고 생각한다.

남자 역시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한다.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삶을. 특별한 일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오늘 어땠어?”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남자는 좋아한다. 아내는 낮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하거나 병원에 다녀오면서 시장에 들러 사온 과일 이야기를 한다. 관리비 고지서가 나왔는데 난방비가 많이 나왔다든지 또는 전에 살던 아파트 경비아저씨를 이곳에서 만났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특별한 저녁 약속이 없다면 대부분 남자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한다.

남자는 대개 퇴근을 8시에 하는데 그때 강남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러나 정확하게 8시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스 정류소까지 걸어가는 시간, 버스가 오는 시간 등 변동이 있어 10분 정도는 더 늦어지기 일쑤다. 아내는 8시부터 시장기를 느낀다. 남편과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참고 저녁준비를 한다. 아내는 9시면 식탁을 다 차려놓고 시계를 본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도 남편이 오지 않으면 아내의 시장기가 들끓는다. 10분이 지나면 시장기가 폭발한다. 아내는 문자를 보낸다. “어디야?”

예전에 어느 항공사의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하교 길에 집으로 뛰어가는 광경을 담은 그 광고의 카피는 이랬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는 걸어서 가지만 집으로 갈 때는 뛰어갑니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남자는 내려야 할 정류소가 아직 멀었는데 벌써 일어선다. 문 앞에 서서 차문이 열리길 초조하게 기다린다. 드디어 차문이 열리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도, 쉰 살이 넘은 남자도 집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야구는 가정적인 운동경기다. 좀 엉뚱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야구는 집을 떠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경기라고. 집을 나가려는 사람과 못 나가게 막는 사람, 공격과 수비는 그렇게 나뉜다. 점수를 내기 위해 타자는 집을 나가야 한다. 안타를 치든 볼을 잘 가려 포볼을 얻든 투수가 던진 공을 몸으로 맞든 어떻게든 집을 나가야 한다. 그리고 집 나간 사람이 1루와 2루를 지나고 3루를 돌아 홈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점수를 얻는 경기다.

홈런도 그렇다. 오른쪽 담장을 넘기든 왼쪽 담장을 넘기든 비거리가 얼마든 어쨌든 타자가 한번에 1루와 2루와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는 것을 말한다. 홈으로,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기뻐하는 경기. 관중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고 환호하는 경기. 야구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집을 향해 달리면서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종일 타석에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헛스윙, 어림없는 파울, 평범한 내야 땅볼 같은 것만 친 타자였다 해도, 어쩌다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맞춘 타구는 내야수 정면으로 날아가 병살타가 되고 마는 그런 타자였다 해도 절망하기엔 이르다. 경기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니까.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돌아갈 집이 있다면, 그 집이 크든 작든, 방이 다섯 개든 하나든, 전세든 월세든, 그 집으로 뛰어간다면 우리는 끝내 홈런타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귀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응원의 환호가 들린다.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홈런이다.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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