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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땀의 붓질, 회화로 돌아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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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폴란드 화가 빌헬름 사스날(43)이 가족 여행 사진을 모티브로 그린 ‘무제(캐스퍼와 앙카)’. [사진 플라토]

코린토스 지역 도공의 딸은 곧 떠나갈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따라 그렸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서 주장한 최초의 그림이다. 그림은 ‘그림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은유일까. 우리말에서도 ‘그림’ ‘그리다’ ‘그림자’가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가장 오랜 예술 형태 중 하나인 회화는 자연을 평면 위에 그럴싸하게 재현하는 역할을 사진에 빼앗기고, 이어 미디어와 설치에 그 자리를 위협받으며 ‘종말’과 ‘복권’이 끊임없이 거론되는 처지가 됐다. 이처럼 ‘보수적 장르’ 취급을 받던 회화에 대한 조명이 최근 잦아졌다. 2013년 런던 테이트 브리튼 에 이어 지난해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회화 전시가 열렸다. 지난해 4월 서울 영등포동에 문 연 대안공간 ‘커먼센터’도 개관전으로 한국의 젊은 화가 69명의 그림을 모은 ‘오늘의 살롱’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서울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6월 7일까지 열리는 ‘그림/그림자_오늘의 회화’ 전은 이 같은 움직임의 연장선에 있다. 백현진(43)·박진아(41), 중국의 리송송(42), 미국의 헤르난 바스(37), 영국의 리넷 이아돔-보아케(38)와 질리언 카네기(44) 등 차세대 화가 12명의 그림 35점을 걸었다.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이며 배우이자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백현진은 실은 20년 가까이 뚝심있게 그림을 그리며 서울·런던·밀라노 등지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다. 그가 5년 동안 그림 위에 덧그려 지워 나간 회화 세 점이 전시장 앞머리를 차지했다. 리송송은 직접적인 정치 발언을 피한 채 흐릿한 인간의 기억처럼 파편화된 화면을 만들었다. 리넷 이아돔-보아케는 고야·마네·세잔 등 거장들의 작품을 닮은 듯한 장면에 주인공을 흑인으로 내세웠다. 아프리카계 영국인 여성 작가로서 갖는 문제의식이다. 이아돔-보아케는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했고, 터너상 후보에도 올랐다. 질리언 카네기의 정물과 풍경화는 진부해 보이지만 다가가면 작가만의 개성이 확인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손쉽게 이미지를 찍고,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캡처할 수 있는 시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를 통해 보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 전시다.

 조나영 선임연구원은 “회화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서 과거 회귀적 태도가 보이는 ‘기대감소 시대’다. 젊은 화가들이 회화의 유산을 동시대 맥락에 전략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 가장 전통적인 ‘붓질’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 3000원, 초·중·고생 2000원. 1577-7595.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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