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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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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논설위원

미국에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돌아왔다. 미국의 힘을 신봉하는 일방주의, 이상주의 노선이 이란 핵문제를 놓고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조지 W 부시 미 공화당 행정부 1기를 수놓았던 대외정책이다.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 네오콘이 수(數)의 힘을 내세워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국제협조주의, 현실주의 정책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란 핵문제는 지금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이란의 평화적 핵 활동은 보장하되 핵무기 제조 능력은 억제하고 제재를 푸는 협상이 막바지 단계다. 이달 말 타결 시한을 앞두고 5개 유엔 상임이사국·독일(P5+1)이 스위스 로잔에서 이란과 무릎을 맞대고 있다.

 네오콘 주도의 공화당은 거침없다. 상원의원 47명이 지난 9일 이란 지도부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핵 합의를 해봐야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핵 합의는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행정협약(executive agreement)에 불과한 만큼 차기 대통령이 폐기할 수도, 의회가 언제든 수정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서한은 자신들 임기가 오바마(2017년 1월)보다 길다고 비꼬기도 했다. 핵 협상을 깨려는 벼랑 끝 전술이 따로 없다.

형식도 고약하다. 행정부가 교섭 중인 외국 지도부를 야당이 맞상대한 것이다. 핵 협상에 대한 불만을 넘어 오바마를 바지저고리로 만들겠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1930년대 이래 미국의 대외 합의는 94%가 행정협약인데도 말이다. 뉴욕타임스 등 40개 이상의 미국 신문들이 사설에서 공화당을 비판했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가. 미국 정치의 당파주의가 갈 데까지 갔다. 미국 국내 정치가 국제정치의 큰 변수가 되고 있다.

 공화당이 상도(常道)를 벗어난 것은 또 있다. 이란과의 핵 협상에 반발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초청해 상·하원 합동연설 기회를 주었다. 오바마와는 사전 상의가 없었고, 그 결과 정상회담도 없었다. 가장 강력한 양자 동맹인 미·이스라엘 관계가 반쪽짜리 매파 간 동맹이 돼버렸다. 네타냐후는 오바마 핵 협상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핵 시설을 존치하는 협상안이라면 이란의 핵 무장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란 정권의 이중적 행태가 바뀌지 않을 것인 만큼 핵 인프라 폐기와 제재 지속을 요구했다. 2년 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밝힌 ‘불신하고 폐기하라, 그리고 검증하라(Distrust, dismantle and verify)’ 원칙에 살을 붙여 설명했다. 오바마가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련 군축협상 모토인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를 따르고 있는 점을 비튼 것이었다.

 네타냐후의 요구는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이 대북 핵 협상 초기에 내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와 다를 바 없다. 북한은 당시 패전국에나 쓸 수 있는 용어라고 반발했고, 교섭은 겉돌았다. 오바마가 이란의 핵 활동 ‘원천 봉쇄’에서 ‘관리’로 간 데는 북핵 협상 실패의 교훈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란에 핵의 평화적 이용까지 포기하라는 협상은 현실적으로 성사되기 어렵다. 이란은 중동의 강국이다. 세계 굴지의 원유·천연가스 생산국이자 시아파의 맹주다. 과도한 압박으로 이란이 북한에 이어 다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 핵 개발에 나서면 국제 비확산체제는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오바마가 집권 내내 제2의 북한을 막으려는 사이 정작 북한은 핵 무장으로 내달았다. 핵무기의 소형화, 다종화, 정밀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 역할론에 기대어 전략적 인내를 고집한 결과는 참담하다. 중국의 북한 비핵화 노력은 가늠하기 어렵다. 오바마는 이란과의 핵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후속 조치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에서 이란 핵문제 파장은 북핵과 비교도 안 된다. 이란과의 성공적 핵 합의는 오바마의 치적일 수 있다.

이란 핵 협상은 북한 비핵화 정책의 재검토 계기가 돼야 한다. 비핵화의 목표는 포기할 수 없어도 현실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를 원점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북핵 불용(不容) 원칙은 정책이 아니다. 대북 핵 외교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할 때가 됐다. 핵을 군사력으로만 막으려면 끝이 없다.

오영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