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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뚜렷한 한국미술에 기대 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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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자기 작품처럼 알록달록한 웃도리를 입은 작가 최정화(42)씨가 앞장서고, 그 뒤를 검은 옷차림의 남녀 세 명이 따랐다.

20일 오후 9시쯤, 서울 삼청동 달동네로 오르는 길은 어두웠지만 일행은 "옛 골목이 풍기는 구수하고 정겨운 맛이 좋다"며 사진기를 들이댔다.

최씨 집으로 몰려가고 있는 손님들은 일본 도쿄 모리(森) 미술관의 학예연구원들이었다.

오는 10월 18일 문을 여는 모리미술관(관장 데이비드 엘리엇) 앞 뜰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환경조형물을 설치한 최씨가 그의 애호가가 된 일본 친구들에게 집구경을 시켜주는 자리였다.

"세계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만 뽑았는데 그 가운데 최정화씨가 당당하게 선발돼 저도 어깨가 으쓱했어요."

지난 가을부터 모리미술관의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김선희(44.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씨는 "한국 미술계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우리 작가 소개나 작품 소장에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모리미술관 학예연구실팀은 2004년 12월 개막하는 특별전 '화끈과 짜릿:아시아의 현대문화'전에 초대할 한국 작가 탐색을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김씨를 비롯해 난조 후미오(54.南條史生) 부관장과 가타오카 마미(38.片岡眞實) 큐레이터는 25일까지 서울.광주.부산을 돌며 화가.건축가.큐레이터.디자이너.영화인 등 문화계 사람들을 폭넓게 만날 예정이다.

이들은 이미 김홍희 쌈지스페이스 관장,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부관장, 안소연 삼성미술관 수석학예연구원, 서진석 대안공간 루프 대표 등과 즐거운 모임을 열었다고 자랑했다.

중국부터 터키까지 아시아 17개 나라의 26개 도시를 방문할 이들이 왜 한국부터 찾았을까 궁금했다. 난조 부관장이 "중국부터 가려 했지만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때문에 한국이 우선 순위가 됐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뒤 입을 열었다.

"20세기는 서구 미술이 일방적으로 아시아를 누르던 시대였죠. 21세기는 동북아시아의 문화가 제 목소리를 낼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중국.일본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세계 미술계에 동양미술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누군가가 그 중심이 돼야 하는데 중국은 세계 화단에 진출하는 야심만 크고, 일본은 일본 것만 너무 챙기는 경향이 있어 한국 미술과 작가군의 활력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난조 부관장은 큐레이터를 맡았던 1998년 타이베이 비엔날레에 한국 작가를 7명이나 초청하는 등 한국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미술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미술의 모습을 물었다.

"한국 현대 미술은 메시지가 뚜렷해서 좋아요. 작가들이 뭘 얘기할지 확실하게 알고 작업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 작가들은 모호하고, 중국 작가들은 너무 거칠어요. 바탕이 좋은 한국 작가들이 세계 미술계로 뻗어가려면 미술관과 화상이 더 뛰어야겠지요."

미술관 제도연구가 전문인 가타오카는 "한국과 일본은 미술관 제도가 비슷한 것 같다"며 "국.공립미술관과 각 지역 미술관들이 보다 합리적인 프로그램을 갖춰야 한다"며 "지금은 세금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김선희 큐레이터는 "모리미술관이 나를 초빙한 건 한국과 일본 미술의 활발한 교류를 위한 포석"이었다며 한국 미술관이 일본 큐레이터를 초청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내다봤다.

한국과 일본 미술에 대해 정담을 나누던 두 나라 미술인들은 이야기에 취하고 삼청동의 달구경에 취해 밤이 깊은 줄도 잊은 듯했다.

정재숙 기자

<사진 설명 전문>
한국 작가와 한국 문화 탐색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일본 모리미술관 학예연구원들이 서울 삼청동 최정화 작가의 집을 찾아 긴 이야기를 나눴다. 왼쪽부터 난조 후미오 부관장, 가타오카 마미 큐레이터, 최씨, 김선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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