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36) 뿌리 내린 군산 야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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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67년 군산중 졸업생을 중심으로 군산고에 야구부를 창설하려던 시도는 학교 측의 무성의로 백지화됐다. 그래서 군산중 졸업생들은 군산 지역의 고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야구를 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8명의 졸업생 가운데 4명이 서울 동대문상고에 진학했고 3명은 휘문고에 입학했다.

나는 군산고를 고집하다간 모든 계획이 백지화되겠다 싶어 목표를 수정했다. 군산고를 포기하고 군산상고를 택해 야구부 창단을 추진했다. 그리고 4개 초등학교에서 배출되는 야구선수들을 수용하기 위해 군산중 외에 군산남중에도 야구부 창단을 유도했다.

1968년. 마침내 군산남중과 군산상고에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군산상고에 야구부가 생기자 1년 전에 서울로 갔던 군산중 졸업생 가운데 두명이 고향으로 내려왔다. 군산 뿐만 아니라 인근의 정읍.전주 등에서도 운동에 소질있는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정읍중학교의 노석현이라는 유망주가 군산상고에 입학했고, 또 한명의 재질있는 선수가 전주북중에서 군산남중으로 전학해 야구를 했다. 그가 바로 훗날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으로 성장한 김봉연(현 극동대 교수)이다.

김봉연은 제발로 찾아왔다.그는 군산남중 야구부 창단 당시 전주북중 2학년이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또래보다 한뼘은 더 컸고 힘을 잘 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꼭 야구를 하고 싶으니 받아주세요"라며 전학을 간청했다. 그래서 68년 군산남중에는 김봉연과 김일권.송상복 등 제법 굵직굵직한 선수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군산남중.군산상고 야구부에 크게 공헌을 한 분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분이 당시 교장으로 있었던 김병문 선생님이다. 중학교와 고교의 교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그는 전북도 학무국장을 역임한 분으로 매우 의욕적이었다. 학교 운동장이 야구장으로 쓰기에는 비좁자 '동창 한명이 운동장 한평 보태기 운동'을 펼쳐 학교 운동장을 약 4천평이나 늘렸다.

김교장은 군산상고에 야구부 합숙소 겸 매점을 지어 형편이 넉넉지 못한 선수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사연은 이랬다. 김교장이 야구부원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어느날, 평소에는 가장 성실하게 훈련하던 양기탁이라는 선수가 제대로 뛰지 못하고 비실거렸다.

그 자리에서 양기탁을 불러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배가 고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 이렇게 셋이 살았는데 그 어머니가 군산부두에서 생선을 사 노점상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장사가 신통찮을 경우에는 아침을 못먹고 나올 때가 많았다. 그날도 아침을 굶고 등교해 지쳐서 제대로 뛰지를 못했던 것이다.

김교장은 이런 딱한 사연을 내게 들려주면서 뭔가 도와줄 길을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김교장과 나는 의기투합해 교사(校舍) 뒤편에 건물을 지어 한쪽은 매점 겸 식당으로 쓰고, 한쪽은 지방 출신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합숙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김교장은 매점에서 생기는 이익을 선수들의 부식비로 썼다.또, 쌀은 우리 경성고무가 직영하는 정미소에서 필요한 대로 공급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굶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게 된 양기탁은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라는 칭호를 얻게 된 72년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에서 극적인 동점타를 때려냈고 그해 고교선발로까지 뽑혔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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