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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기만 한 '반성과 사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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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쳐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습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내용의 일부다. 이어 98년 10월 채택한 김대중-오부치 ‘한·일 미래 파트너십’ 선언에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대목이 들어가 있다.

 과거 일본 정부의 이러한 공식적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본 내에서는 기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아베 신조 총리의 수정주의 역사관에 편승해 ‘반성과 사죄’에 대한 한국과 중국 측의 지나친 요구가 일본 내의 반한·반중 감정을 높이고 화해를 어렵게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일본의 중도적인 학자들까지도 여기에 가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우려된다.

 우선 일본 학자들은 비교론적 시각에서 ‘반성과 사죄’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300년 이상, 영국은 인도를 90여 년, 프랑스는 베트남을 60년 식민지배했지만 이들이 피식민지 국가들에 공식적인 문건으로 반성, 사죄, 보상을 약속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하며 보상까지 했는데도 한국이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왜 일본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것이다.

 법률적 타결론 또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의거해 일단락됐으므로 더 이상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시각이다. 이미 중국과는 중일평화우호조약, 한국과는 한일기본조약이라는 강화 조약을 맺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는 취지다. 그게 국제관례라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측은 ‘동기가 옳으면 나쁜 결과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동기주의적 도덕론을 활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나치 독일의 전쟁은 계획된 침략이었지만 당시 일본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래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문서 중 다음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전쟁과 침략의 결과는 문제가 있지만 전쟁의 동기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은 현실주의 논리다. 당시의 무정부적 약육강식 국제질서의 눈으로 보면 일본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한국 병합의 국제적 승인을 얻는 대가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승인했으며 영국의 인도 지배가 위협받을 경우에 일본이 파병한다는 교환조건의 협정을 체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반도 병합이) 범죄라면 영국은 공범이며 미국 또한 종범이 될 것”이라고 강변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령이 됐을 거라는 논지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어처구니없이 보이는 이러한 논리가 일본 내에서는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곤 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경우 인근 유럽 국가를 침공했을지언정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같은 유교 문명권에 속하고 오랜 선린관계를 이어왔던 이웃 국가를 식민지 속국으로 침탈한다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일이다. 법적 타결만 해도 그렇다. 강제적인 합방을 ‘합의에 의한 합방’으로 환치하고 ‘위안부’ 문제를 누락하는 등 미진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기본조약을 최종적인 것으로 고집하는 것을 우리의 국민이 수용하기 어렵다.

 ‘동기의 순수성’ 역시 일본의 아전인수적 해석일 뿐이지 이웃 국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현실주의 결정론도 공감을 얻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를 기정사실화한다는 건 이러한 체제가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일본이 그러한 질서와 논리를 과감히 배격하고 진정한 평화를 표방할 때만이 이웃 국가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는 이제 물 건너갔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가 힘을 얻는 지금 일본의 국민정서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한없이 어둡게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본의 자기 합리화 뒤로 한·일 관계 개선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20세기를 마무리하지 못한 21세기의 비극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