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8. 스포츠 과학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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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연을 마친 일본 도쿄대의 이카이 미치오 박사右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필자. 이카이 박사는 스포츠 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나는 경성제일고보에 다닐 때부터 운동을 즐겼다. 교토제국대 재학 땐 테니스 선수로서 일본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말하자면 나는 스포츠맨인 셈이다. 그리고 교토제국대에서 화학을 공부한 과학자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내게 스포츠 과학화의 필요성을 눈뜨게 했는지 모른다. 그 촉매가 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1964년에 열린 도쿄올림픽이었다. 거기서 내가 체험한 것은 세계 스포츠의 놀라운 발전과 그 배경이 된 스포츠와 과학의 접목에 따른 성과였다.

사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나는 선수 관리에 의학과 과학의 접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표선수들에게 건강검진을 받도록 했다. 남자농구 대표선수였던 이경우(별세)씨는 혈압이 매우 높아 격렬한 운동과 스트레스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결과 이씨는 대표팀에서 빠지고 대신 이병구씨가 태극마크를 달았다. 난 일단 결심하면 행동으로 옮기고, 그 결과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려 애쓴다.

60년대 한국의 스포츠과학 분야는 불모 상태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고심 끝에 나는 의학자들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서울대를 비롯, 연세대.우석대.이화여대와 경찰병원에서 일하는 의학계 석학들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의 반응은 협조적이었다. 나는 이들을 모두 선수 훈련 현장에 배치했다. 선수들의 체력을 점검.관리하고 훈련장에서 일어나는 신체상 문제들을 해결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선수들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키려 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스포츠과학을 실현할 수 있는 장비와 시설.노하우가 전무했다. 제대로 된 스톱워치나 산소 호흡기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뿌린 씨앗은 서서히 결실을 나타냈다. 65년 10월 연세대의 홍석기 박사가 '마라톤 풀코스 주파 중의 생리학적 변화 및 대책 강구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이 논문이 우리나라 스포츠 과학화 과정의 첫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스포츠 과학화를 위한 연구에 가속이 붙었다.

연세대와 공군 항공의료원 합작의 '운동선수의 저압훈련에 관한 연구', 서울대의 '운동선수의 각종 근력에 관한 연구' 등 중요한 논문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따라 코치의 지도 방법은 물론 선수의 체질 개선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올림픽에 대비해 선수들이 해발 2300m 고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산소량이 적은 고지에서 훈련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한라산과 지리산에 트레이닝 센터를 만들어 보자는 안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스포츠의 과학적 연구를 위해 70여 명의 의학자가 동원되었다. 연구 발표회가 수십 회 열렸다. 일본과 미국의 스포츠과학자를 초청하기도 했다. 66년 8월 6일에는 세계적 권위자인 일본 도쿄대의 이카이 미치오 박사를 초청해 스포츠과학의 이론과 실기를 강의토록 했다. 71년 내가 체육회장직을 떠날 때까지 6년에 걸친 스포츠과학 훈련에 참여한 선수는 연인원 2만여 명에 달했다. 쪼들리는 예산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즉시 결과가 나오지도 않는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동료 임직원의 노고가 참으로 컸다.

무리를 감수하며 첫걸음을 뗀 우리 스포츠의 과학화 작업이 즉시 금메달을 만든 것은 아니다. 나는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이 과업을 진행해 나갔다. 스포츠과학을 통해 우리 스포츠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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