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리콘밸리 노숙자 태우고 '4달러짜리 숙소'는 달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미국 실리콘밸리 새너제이 버스환승센터는 밤이면 24시간 운영 노선버스를 숙소 삼는 노숙인들이 모여든다. 그 중 상당수는 이 지역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다 실직한 사람들이다. [인터넷 캡처]

가로등 불빛 너머로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오후 8시35분. 미국 실리콘밸리 남쪽 새너제이의 한 버스정류장에 남루한 외투와 트렁크 등을 든 노숙자 10여 명이 모여든다. 이들은 잠시 뒤 도착한 팔로알토 행 22번 버스에 일제히 올라탄다. 뒷좌석부터 곳곳에 자리를 잡은 노숙자들은 버스가 노선을 따라 종점인 팔로알토까지 두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쪽잠을 청한다. 종점에서 내린 이들은 잠시 머무른 뒤 다시 새너제이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최근 막을 내린 미국 시네퀘스트영화제와 트루폴스영화제 등에 연이어 상영돼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 ‘호텔22’에 나오는 장면이다. 호텔22는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에서 새너제이까지 종단으로 40㎞를 달리는 22번 노선의 버스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실리콘밸리를 아우르는 산타클라라 카운티에서 24시간 쉬지 않고 운영하는 이 버스가 밤이면 노숙자들의 ‘이동 숙소’로 변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 스탠퍼드 대학생이 찍은 이 다큐는 정보기술(IT)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 최고의 부자들이 즐비한 실리콘밸리의 어두운 구석인 극심한 빈부격차를 조명하고 있다. 미국 주택도시개발청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에는 7500명이 넘는 노숙자들이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노숙자 쉼터가 부족해 이중 75%는 쉼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인 것으로 조사됐다.

 최고 부자 동네에 노숙자가 넘치다 못해 ‘버스 호텔’까지 생겨난 이유는 이 지역 집세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비싸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8일 주택담보연구사이트인 HSH 자료를 인용, 미국 내 27개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원금과 이자·세금·보험을 고려한 주택 중간값을 조사한 결과 실리콘밸리와 인근 샌프란시스코가 주택마련비용이 가장 비싸다고 보도했다. 이곳에서 중간값의 주택을 구입하려면 연봉이 14만2448달러(약 1억6000만원)는 돼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장 싼 곳인 피츠버그(3만1716달러)의 4배를 훌쩍 넘는 수준이다.

 실리콘밸리 ‘호텔22’의 ‘숙박비’는 왕복 4시간을 이용한다고 해도 단돈 4달러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한 달 정기패스를 이용하면 더욱 저렴하다. 편히 누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푼돈으로 안전하고 추위도 피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미국 인터넷신문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호텔22를 이용하는 사람은 실직자뿐 아니라,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하위계층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 지역 노숙자관련 단체인 다운타운 스트리트의 크리스 리처드슨 소장은 “호텔22는 노숙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몇달러 안되는 돈으로 그럭저럭 방해받지 않는 밤잠을 잘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