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문화읽기] 영화 '코어'의 상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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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여름이 다가오면 화려한 볼거리의 할리우드산 초호화 블록버스터 SF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린다. 올해도 예외는 아닌데, 그 첫 테이프는 영화 '코어(CORE)'가 끊었다.

영화 제작자이자 극작가인 쿠퍼 레인이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화산에서 마그마가 분출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장관을 보고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배를 타고 화산 속으로 들어가면 지구 한가운데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코어'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국 정부는 인공 지진으로 적을 공격하는 비밀병기를 개발한다. 그로 인해 지구의 핵, 코어는 갑자기 자전을 멈추고, 지구 자기장이 사라지면서 갖가지 기상 이변이 속출한다.

비둘기 떼가 방향을 잃고 벽이나 차창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돼 떨어진다. 심장박동기를 단 사람들은 갑자기 기계가 이상을 일으켜 죽고 만다.

차량의 전자장치는 모두 먹통이 되고 시내는 수라장이 된다. 미국은 지구 외핵의 자전을 다시 일으켜 지자기를 재발생시켜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6명의 전문가 팀을 지구 내부로 내려보낸다.

인간이 외핵까지 들어간다는 설정은 좀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과학적으로 꽤 그럴듯한 장면도 있어 과학자들도 관심 있게 지켜본 영화 중 하나다.

실제로 외핵의 자전이 멈추면 지구 자기장이 사라질 수 있다. 지구 내부 온도는 무려 4천도에 달하기 때문에 전하를 띤 이온들이 회전하면서 그 주위로 유도 자기장이 형성돼 지자기가 생긴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외핵은 철이나 니켈 등이 유체 상태로 존재하는데 핵 내부의 위.아래 온도와 밀도 차이에 의해 대류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영화 같은 설정에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 설령 외핵의 자전이 갑자기 멈춘다 해도 생성된 자기장이 소멸하는 데는 수천 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지자기가 사라지면 영화에서처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까. 비둘기떼가 방향을 잃고 아무 데나 부딪쳐 죽는다는 설정은 좀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꽤 그럴듯한 얘기다.

비둘기는 머리뼈와 뇌 경막 사이에 자성을 띤 물질이 존재하는데, 이 곳이 지자기를 인지해 방향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생물들이 지자기로 방향을 찾아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01년 11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연구논문에 따르면, 지빠귀 나이팅게일이라는 철새는 몸 속 자기장 센서를 이용해 스웨덴에서 출발, 2천km를 지나 아프리카 중남부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구 자기장이 사라진다면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피해는 태양에서 나온 고에너지 입자에 생명체들이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지구 자기력선은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 표면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극지방 상공으로 이동하도록 만든다.

이 입자들이 상층 대기와 충돌하면서 만드는 빛이 바로 오로라다. 만일 고에너지 입자가 생체 피부에 그대로 닿는다면 염색체 이상을 일으켜 암을 비롯한 갖가지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전자기기들도 고에너지 입자의 피폭을 받으면 작동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코어'가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지구 외핵의 깊이는 무려 1천2백~3천5백㎞ 사이. 지금까지 인간이 가장 깊게 들어간 것은 겨우 12㎞.

설령 들어가서 폭탄을 터뜨린다고 해도, 외핵의 대류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끔찍한 비극을 막는 유일한 길은 '인공 지진으로 적을 공격하는 병기'를 처음부터 개발하지 않는 것이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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